척박한 환경과 부족한 인프라에도 불구하고 역대급 재능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곳이 우리나라다. 굳이 김연아, 김연경, 박지성, 손흥민같은 월드클래스까지 언급할 필요도 없다. 과거 일본이 축구에서 "한국은 스트라이커가 태어나는 나라이고, 일본은 만드는 나라"라고 했던 예에서 알 수 있 듯, 우리는 우리 여건과 시스템에 비해 너무도 감사한 선수들을 배출해 왔다. 또한 그들로 인해 걱정없는 시간을 대책없이 보내기도 했다.
배구는 단체 구기 종목 중에서 선수 한 명의 활약으로 가장 많은 변수를 만들 수 있는 종목이다. 소위 '몰빵'의 위력이 가장 크게 나타날 수 있는 종목 중 하나다. 전성기 시절의 삼성화재가 '가빈화재'라고 불릴만큼, 가빈 혹은 안젤코에게 몰아주는 배구로도 정상 등극이 가능했던 종목이며, OK저축은행도 시몬 한 명에 대한 엄청난 의존도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던 바 있다. 모든 종목에서 슈퍼 에이스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다만 그의 플레이 자체,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다른 것들의 비중을 볼 때, 배구는 그 한 명의 플레이 자체로 가져오는 것들의 비중이 상당하다.
한국여자배구에는 김연경이라는 슈퍼스타가 존재했다. '세계 여자배구계의 메시', '50년에 1명 나올 재능'이라는 찬사를 전세계에서 받았던 김연경은 자신에게 붙은 수식어에 어울리는 활약을 펼쳤고, 찬란한 빛으로 한국여자배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가 은퇴하면서 이제 빛의 이면, 그림자의 시간이 드리웠다.
한명의 슈퍼스타가 등장하면 대중과 미디어는 열광한다. 하지만 협회와 연맹은 슈퍼스타 이후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슈퍼스타의 전성기가 기울때 쯤에 항상 '제 2의 OOO 찾기'를 시작한다. 여자배구도 마찬가지. 지겹도록 '제 2의 김연경'을 찾았다. 대단한 욕심이자, 무사안일이다. 세계에서 50년만에 1명 나올 만한 재능이라는 김연경이 우리나라에 태어나 준 것도 감지덕지인데, 그런 선수가 또 하늘에서 뚝 떨어져주기를 바란다. 대한민국의 프로 스포츠는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그 저변과 뿌리에 대한 취약성은 여전하고, 어린 선수들의 수급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 사회 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다. 여자배구는 '제 2의 김연경 찾기'가 아니라 '김연경 없는 배구에서의 활로'를 찾았어야 한다. 풀이 넓지 않은 시스템에서 쉽지 않은 일이지만, 또다른 김연경이 나타나주길 바라는 것보다는 현실적이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제 2의 김연경은 '당연히' 나타나지 않았고, 내리막에 접어들었다. '김연경의 하드캐리'가 이루어냈던 높이가 워낙 대단하다보니, 암흑기의 하강 속도는 그야말로 역대급이다. 결국 발리볼 네이션스 리그(VNL)에서도 2부로 강등되며, 다음 시즌부터는 VNL에 참가하지 못한다.
사실, 여자배구의 VNL 출전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어불성설이었다. 대회에 나서는 다른 팀들에 비해 기량이 확연히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주요 팀들의 승점 자판기였다. 국제배구연맹(FIVB)이 냉정하게 실력으로 참가자격을 따졌다면 이미 수년 전에 VNL에서 퇴출됐을 것이다. FIVB가 세계랭킹은 물론, 각 나라의 리그 흥행까지 고려하여 자격을 준 까닭에 우리나라가 꾸준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최하위 팀이 퇴출되고, 새롭게 다른 팀이 합류하는 시스템이 적용되면서, 우리나라 여자배구는 FIVB 국제대회가 VNL로 개편된 2018년 이후 처음으로 대회 출전 자격을 상실하게 됐다. 심지어 이 대회 출범당시, 12개의 코어 국가 중 하나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위상이 급락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상대팀들의 승점 맛집이 되더라도 VNL에 꾸준히 참가하여 경쟁력을 갈고 닦는 것과 그렇지 못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부끄러운 성적표를 받더라도 어쨌든 꾸준히 함께 누빌 수 있는 자격은 유지했는데, 이제는 그것조차 못하게 됐다.
더 문제는 우리가 VNL에 다시 복귀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강등되면서 새롭게 합류한 팀은 우크라이나다. 기존에 참가하지 못하던 국가 중 FIVB 랭킹이 가장 높은 팀(16위)이었다. 새롭게 합류하는 팀은 철저하게 실력만으로 VNL 출전 자격을 얻게되는 것이다. FIVB의 최신 세계 랭킹에서 우리나라 여자배구는 39위다.
최근 경남 진주에서 열린 2025 코리아인비테이셔널 진주 국제여자배구대회에서는 1승 4패를 기록했다. 대표 1진이 모두 빠진 일본(5위)에게 세트스코어 3-2로 이겼지만, 마지막 5세트에서 논란의 판정이 연달아 나오며, 이겨놓고도 비난을 받았다. 아르헨티나(17위), 프랑스(15위), 스웨덴(26위), 체코(13위)에게 패했는데, 이중 아르헨티나와 스웨덴은 VNL에 참가하지 못하는 팀이다. 우리나라가 VNL에 복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아르헨티나, 스웨덴 같은 팀들을 20개 정도 제쳐야 한다. 하지만 랭킹을 끌어올리기 위한 방법도 크게 마땅치가 않다. 안방에서 열린 대회에서 1승 4패를 거두고, 그 1승 조차도 판정 논란에 시달리는 게 현주소다. 아시아 팀만 놓고 봐도 중국(4위), 일본, 태국(21위), 베트남(22위), 카자흐스탄(35위)이 우리보다 우위에 있다. 41위 대만과도 랭킹 포인트가 8점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세계 무대가 아니라 아시아 자체에서도 경쟁력이 높지 않다.
사정은 남자배구도 비슷하다. 2018년 첫 대회에서 최하위를 차지하며 VNL에서 퇴출됐고, 이후 VNL에 참가하지 못하고 있다. 남자배구는 그래도 세계랭킹 27위로 여자배구보다는 상황이 낫다. 하지만 VNL 복귀 가능성은 여전히 요원하다. 올해 네덜란드가 최하위로 퇴출됐고, 세계랭킹 17위인 벨기에가 내년에 VNL에 출전한다. 우리로서는 10개국 정도는 밀어내야 하는 상황이다. 아시아에서도 일본(5위), 이란(13위), 카타르(20위), 중국(25위)이 우리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배구는 축구나 농구보다는 국제적인 범위가 넓지는 않다. FIVB 회원국은 222개로, FIFA(211개국), FIBA(213개국), IOC(206개국)보다 더 많지만, FIVB 세계 랭킹에 포함되는 국가는 남자 89개국, 여자 74개국으로 그렇게 많지 않다. 남자 210개국, 여자 196개국이 포함된 축구나 남자 157개국, 여자 120개국이 랭크되는 농구에 비해 그 규모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오히려 남자 81개팀, 여자 28개팀을 순위에 올린 야구(WBSC)와 가까운 범위다.(물론 WBSC는 야구와 소프트볼을 총망라하지만 가입국 수 자체가 134개로 현저히 떨어진다) 여기에 호주, 뉴질랜드 같은 국가들이 배구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상황인데, 전체적으로 가맹국은 많지만 적극적으로 해당 종목을 운영하고 투자하는 국가는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국제 경쟁력은 긍정적이지 않다.
남자배구는 이미 수년전부터 힘든 시기를 겪었다. 예술 요소 평가가 없는 종목에서 여자부가 남자부의 인기를 견인하는 경우는 정말 보기 힘들다. 한국 배구가 그랬다. 남녀 모두 내리막이었지만, 여자배구는 김연경의 찬란함이 쇄락하는 비극마저 가려줬다. '진정한 스포츠팬보다 국가주의'가 우선인 우리나라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선전하는 여자배구의 활약은 국내까지 위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김연경의 빛이 사라지면서 처절한 민낯이 드러났다.
배구의 객관적인 목표는 아시안게임에서 메달권에 진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도 쉽지 않다. 감히 VNL이나 올림픽을 언급할 수준이 아니다. 출발점과 눈높이를 냉정하게 잡고 시작해야 한다. 축구나 농구로 치자면 월드컵, 야구로 치자면 WBC에 출전할 자격조차 갖지 못한 게 한국 배구의 현실이다. 오매불망 '제2의 김연경'만 찾아서도 안될 것이며, 스스로 중징계를 내린 대상들을 이제와서 사면해 대표팀에 포함하겠다는 촌극을 벌여서도 안될 것이다. 우박과 된서리를 맞으면서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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