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후반 뢰블레의 주축이었지만 워낙 천재적인 선수들이 많았던 탓에 크게 언급되지는 않았던 선수. 하지만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의 A매치 1000번째 골의 주인공이자, 98 프랑스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 에마뉘엘 프티(Emmanuel Laurent Petit)다. 프랑스 북서부의 센마리팀(Seine-Maritime)의 디에프(Dieppe)에서 태어났고, 아흐크 라 바타유(Arques-la-Bataille)에서 자랐다. 싹다 모르는 동네다. 다만 이 지역이 노르망디(Normandy)라고 한다. 2차세계대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그 노르망디가 맞다. 프티의 어린 시절 기록은 그렇게 화려하게 남아있지 않다. 지네딘 지단, 티에리 앙리, 로랑 블랑, 다비드 트레제게, 디디에 데샹, 페트릭 비에이라, 클로드 마켈렐레, 마르셀 드사이 등, 그와 함께 프랑스 월드컵을 빛냈던 동료들의 면면이 너무 화려한 탓인지 모르지만, 프티의 어린 시절에 대한 정보는 18살부터 시작된다.
고향 팀으로 보이는 ES 아흐크 라 바티유에서 1977년부터 9년간 뛰었던 프티는 1985년에 AS 모나코로 이적한다. 모나코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중앙과 왼쪽을 커버하는 미드필더로 활약했던 프티는 1991년, 프랑스의 FA컵 개념은 프랑스컵(Coupe de France)에서 우승했고, 이듬해에는 2000년 이후 유로파리그로 통합된 유로피언 컵위너스컵 결승에도 나섰다. 당시 모나코는 독일의 베르더 브레멘에게 패하면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1996-97시즌에는 주장으로 팀을 이끌며 리그앙 우승을 차지했다.
그가 모나코로 이적할 때 팀의 감독이었던 아르센 뱅거가 1997년, 프티를 자신이 이끄는 아스날로 불렀고, 아스날 이적 후 수비형 미드필더로 위치를 바꿨다. 아르센 뱅거의 프렌치 커넥션 중 하나였던 프티는 비에이라와 함께 수비형 미드필더로 호흡을 맞추며 아스날과 프랑스가 펼치는 '아름다운 축구'의 중심에 섰다. 프리미어리그 데뷔 시즌에 더블을 달성했고, 프랑스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이렇게 아스날에서 활약한 2000년까지가 프티의 전성기였다.
이후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지만, 당시 바르셀로나는 최악의 시기를 맞고 있었다. 루이스 피구가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리그에서는 4위로 떨어졌다. 챔피언스리그도 조별 예선에서 탈락했다. 피구의 이적은 물론, 20년 넘게 팀을 이끌던 주제프 루이스 누녜스 회장과 루이스 판 할 감독이 동시에 팀을 떠난 해였던 2000-01시즌의 바르셀로나는 대대적인 변화를 겪고 있었고, 이 시기에 캄프 누(Camp Nou)에 들어선 프티에게는 미드필더가 아니라 수비수로서의 역할이 주어지기도 했다. 결국 프티는 바르셀로나에서의 생활을 한 시즌만에 끝냈고 다시 EPL로 돌아왔다. 이전 소속팀 아스날의 연고지인 런던으로 복귀했지만 팀은 첼시였다. 당시 첼시는 지금과 같은 위상의 팀이 아니었다.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후 중위권을 전전하던 첼시는 98-99시즌에 3위를 차지했지만 이후, 다시 챔피언스리그에 나설 수 없는 순위로 내려앉았다. 프티는 첼시 복귀 후, 원래 자신의 포지션을 찾았고, 2004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첼시는 프티를 영입하던 시점에 웨스트햄에서 프랭크 램파드(Frank Lampard)를 수혈했다. 프티보다 8살이나 어린 램파드는 폴 스콜스, 스티브 제라드와 함께 당시 잉글랜드 미드필드의 핵심으로 성장한 상황이었고, 첼시 합류 후 무릎 부상까지 당했던 프티에게는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첼시와의 계약 종료 후 볼튼 원더러스에서 관심을 보였지만 그는 은퇴를 선택했다.
'아트 사커'에 가장 부합하는 팀이었던 세기말의 프랑스 대표팀은 98년 프랑스 월드컵과 유로 2000을 연달아 우승했다. 개인적으로 98 프랑스 월드컵 당시만 해도 '개최국 버프'가 있기는 하지만 우승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팀이 프랑스였다. 에메 자케(Aimé Jacquet) 감독은 슈퍼스타 에릭 칸토나를 대표팀에서 제외했다. 개최국이기는 하지만 브라질이나 네덜란드보다 우위라는 느낌은 없었다. 지단과 앙리가 풀어가는 공격과 확률 높은 트레제게의 결정력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이때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느꼈던 선수가 프티였다. 그때까지 축구에서 그다지 인기가 높지 않았던,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번호인 17번을 달고 금발을 묶은 채 그라운드를 질주하던 선수. 이미 예선 덴마크와의 경기에서 벼락같은 중거리 슛을 성공시킨 당시 프랑스의 주축이었다. 결승에서 2개의 헤딩골을 성공하며 '역시 지단'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10번의 민둥머리 스타가 아닌 프티가 내게는 가장 인상적이었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완벽한 경기 조율을 뒤받침하던 프티는 프랑스의 전담 키커이기도 했다. 브라질을 3-0으로 잡은 결승에서 동점의 균형을 깨뜨린 첫 골을 만들어 낸 코너킥도 그의 몫이었고, 프랑스 국가대표팀의 통산 1000번째 골이자 98 프랑스 월드컵의 마지막 골도 프티의 몫이었다. FIFA 월드컵의 20세기 마지막 골이기도 했다. 맨체스터 유나티이드의 팬이었던 내게, 그가 아스날 소속이라는 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었다.
탄탄대로가 이어질 것 같았던 프티의 시계는 밀레니엄을 지나며 조금씩 다른 박자를 냈다. 클럽에서의 부침과 마찬가지로 대표팀에서도 비에이라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유로 2000에서는 출전 경기마다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여전한 모습을 보였지만,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세네갈 쇼크와 지단의 부상 공백을 막지 못했다. 프랑스는 예선 3경기에서 골대를 5번이나 맞추는 불운 속에 우승국의 조별 예선 탈락이라는 수모를 당했고, 데샹의 은퇴 이후 비에이라와 프랑스의 중원을 구성했던 베테랑 프티의 월드컵 커리어도 끝났다. 대표팀 은퇴를 선언한 프티는 이후 자크 상티니 감독의 요청으로 짧게 대표팀에 복귀했지만, 2003년에 다시 대표팀 은퇴를 결정했다. 프랑스 국가대표로 A매치 63경기에서 6골을 득점했다.
보통 양발을 잘 쓰는 선수들이 오른발잡이인데, 프티는 특이하게도 왼발잡이면서 양발 활용이 뒤어났다. 정신적으로나 피지컬적으로나 상당히 터프한 선수였고 체력이 뛰어나 엄청난 활동량을 자랑했다. 하지만 투박함에서 끝나지 않았다. 위력적인 중거리 슛은 물론 장거리 패스 능력도 탁월했다. 에너지와 파워, 활동량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패스 능력과 슈팅력을 갖췄으며, 먼 거리까지 아우르는 시야를 겸비했다. 185cm의 신장을 활용한 해딩 경합 능력도 있었고, 태클도 좋았다. 비에이라와 함께 역대 EPL 최고의 미드필드 조합을 만들었던 프티는 바르셀로나에서 1년을 마치고 EPL 복귀 루머가 나돌 당시 맨유로 입단할 가능성도 제기 됐었다. 하지만 아쉽게 첼시를 선택했다. 프티가 첼시와 사인하자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첼시도 드디어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전력이 됐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성공한 시즌 내내 17번을 달았던 프티에게 17이라는 숫자가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아마추어 축구 선수였던 그의 형이 경기 중 쓰러져 사망했는데, 이는 프티가 축구를 그만둘 뻔 한 큰 충격이었다. 그때 사망한 형의 나이가 17살이었기에 프티는 선수 생활 내내 17번을 달았다.
은퇴 후, 방송 해설을 하기도 하고 홈리스 월드컵 홍보대사를 맡기도 했지만, 지도자로 본격적으로 나서지 않은 탓에 그의 행보가 크게 알려지지는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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