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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ize | 글/fOcus

[Baseball] 박철순 - 영혼을 던진 KBO 최초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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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 원년의 HERO

 

2012년 KBS N에서는 대한민국 프로야구 출범 30주년을 맞아 레전드 10명의 선수를 꼽았다. 가나다 순으로 보자면 김기태, 김재박, 박정태, 선동열, 양준혁, 이만수, 이순철, 장종훈, 故 장효조, 한대화 등 10명이다. 여기에 박철순은 없다. 물론 KBO에서 40주년 기념으로 40명의 레전드를 선정할 때에는 포함됐다. 박철순은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36경기에 등판해 24승 4패 7세이브, 방어율 1.84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으로 OB 배어스(두산의 전신)의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다승 2위였던 선수들이 15승이었음을 고려하면 박철순의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규정 이닝을 채운 28명의 투수들 중 1점대 평균 자책점은 박철순이 유일했다. 특히 이 시즌에 세운 22연승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금자탑이며, 앞으로도 당분간 깨지기 힘든 엄청난 성적이다. 1982년 프로야구는 팀당 80경기. 통합 우승을 차지했던 OB의 정규리그 승리가 56승이었으므로, 박철순은 24번의 승리와 7번의 세이브로 팀 승리의 절반 이상에 기여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대 한국 프로야구 최고 투수의 계보를 말할 때 박철순은 등장하지 않는다. 최동원, 혹은 선동열이 먼저다.

 

박철순은 프로에서 15년을 뛰었다. 231경기 76승 53패 20세이브, 통산 방어율 2.95를 기록한 것이 그의 기록이다. 연 평균 5승에 불과하며, 원년의 24승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둔적이 없다. 그래서 원년의 화려함은 있지만, 그 어느 종목보다 기록으로 객관화 되는 경향이 높은 프로야구에서 박철순을 역대 투수 계보의 첨단에 두지는 못한다. 하지만 박철순의 존재로 인해 한국 프로야구는 기록으로 수치화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영역이 스포츠에 존재한다는 것을 원년부터 증명한 셈이다.


배명고, 연세대를 거쳤으며 한국 최초의 쿠바전 승리투수인 박철순은 1979년 한미 대학야구선수권 대회에서 인상적인 피칭을 보여주며, 한국인 최초로 미국 프로야구에 진출한다.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싱글 A팀에 입단한 그는 빠르게 실력을 향상시키며 트리플 A 까지 오른 최초의 한국선수다. 1982년 한국에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OB의 구단주였던 박용민 단장은 평소 친분이 있던 LA다저스를 통해 밀워키 브루어스의 구단주와 독대를 하게 됐고, 어렵사리 박철순을 영입하는데에 성공한다. 박철순이 1956년 3월 12일생이니 당시의 나이 26세. 선수 생활이 길어진 지금으로서는 미국에서 계속 도전을 해도 될 것으로 보이는 나이지만, 서른 살만 넘어도 노장 소리를 들으며 은퇴 시기에 대한 고민이 등장했던 당시의 한국 스포츠계 분위기를 생각하면, 미국에 머무는 것보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더 안정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국으로 돌아온 박철순은  주위의 기대를 저 버리지 않았다. 1982년 3월 28일, LG의 전신인 MBC 청룡과의 경기에 처음 등장한 그는 타자를 압도하는 스피드를 자랑했으며 스크류볼, 팜볼 등을 구사하며 상대를 유린, 9-2로 승리하고 첫 승을 신고한다. 특히나 당시에 박철순이 던지던 팜볼은 이전까지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구질로 타자들에게 '마구'라는 소리를 들으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투수는 공만 잘던지면 된다던 당시의 우리 야구 수준을 뛰어넘는 뛰어난 수비로 '투수는 제 5의 야수'임을 증명했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박철순은 4월 10일부터 9월 18일까지 161일간 30경기에 등판해서 22연승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웠다. 선발-계투-마무리의 개념이 없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놀라운 기록이다. 17번의 선발 승 중 15번을 완투로 장식한 박철순은 다승, 방어율, 승률, 기록상 등 투수 부문 타이틀을 독식하며 프로 원년 MVP에 올랐다. 한국시리즈에서도 1승 2세이브를 올리며 OB가 삼성을 누르고 원년 통합 챔피언에 등극하는 데에 수훈갑이 됐다. 

 

실제로 투타에서 삼성의 전력이 더 앞선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OB에도 노장 윤동균, 김우열을 비롯해, 신경식, 구천서 등 좋은 선수들이 있었지만, 전체적인 선수 구성에서 2위를 차지한 삼성이 우위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투수 부문에서 박철순이 워낙 독보적이기는 했지만, 삼성은 권영호(15승 4패 2세이브 2.37), 황규봉(15승 11패 11세이브 2.47), 이선희(15승 7패 1세이브 2.91) 등 15승과 방어율 2점대의 투수를 3명이나 보유했으며 성낙수 역시 8승 3패 2세이브 평균 자책점 2.81로 상당한 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OB도 박철순 외에 박상열이 10승 투수였고, 선우대영, 계형철, 황태환 등으로 투수진이 구축되어 있었지만, 이중 평균 자책점이 3점 이내였던 선수는 없다. 강철원이 5승 무패 평균자책점 2.18로 좋은 기록을 보여줬는데 45이닝 밖에 투구하지 않으면서 다른 선수들에 비해 확실히 쓰임 자체가 많지 않았다. 김유동의 한국시리즈 만루홈런이라는 만화같은 스토리도 더해졌지만 OB의 원년 우승의 핵심은 단연 박철순이었다.

그러나 박철순의 영광은 여기서 주춤하게 되는데. 그가 전지훈련 중 요추간판 헤르니아라는 허리 부상(쉽게 말해 수핵탈출증 - 허리디스크)을 입게 되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 다음 시즌을 제대로 뛰지 못하던 그는 MBC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인 9월 22일 팬서비스 차원에서 등판했으나, 그를 성원하는 팬들의 함성이 그치기도 전인 1회 1사 1,2루에서 송영운의 타구에 허리를 맞고 쓰러져 실려나가게 된다. 11월 30일, LA의 센트럴 메모리얼 병원에 허리치료차 입원을 하게되고, 치료와 재활로 인해 1984년은 아예 경기에 나서지 못한다. 어렵게 복귀했지만, 지속적인 약물치료와 진통제의 복용으로 심각한 탈모증세가 나타났고, 복귀했던 1985년에도 9월에 다시 허리 통증으로 후송됐다.

 

1982년, 36경기에 등판해 225이닝을 투구했던 에이스는 부상으로 1983년부터 3년간 13경기, 60이닝을 소화하며 1승 5패에 그쳤다. 그럼에도 이 기간 중 평균 자책점은 2점대로 유지했다. 고질적인 부상으로 선수 생명이 끝났다는 말이 나왔던 박철순은 1986년 8월 17일, 한화의 전신인 빙그레와의 원정 경기에 등판해 승리 투수가 되며 9개월만의 승리를 기록했고, 이해에 13경기에서 4승 3패, 방어율 3.54로 부활하며. 야구팬들에게 '불사조'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8년 3월 15일, 그의 날개를 완전히 꺽어 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나고야 만다. CF촬영중에 왼쪽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을 당하고 만 것이다. 수술을 마친 그에게 닥친 문제는 야구를 계속할 수 있느냐가 아닌, 정상인의 삶을 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부활의 아이콘, 불사조라 불리운 사나이

 

하지만 박철순은 포기하지 않았다. 정상인의 생활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그는 물리치료와 한방치료, 사우나등을 병행하며 처절한 재활을 이어갔고, 걷는 것 조차 자연스럽지 못했던 스스로를 다잡아 갔다. 그리고 마침내 1989년 6월 1일, 청주 빙그레전에 등판해 감격의 승리를 기록하니, 1987년 10월 1일 기아의 전신인 해태 전 이후 650일만의 승리했다. 당시로서는 정상적이어도 은퇴를 언급하던 나이인 33세에 이뤄낸 놀라운 복귀는 차라리 기적이었다.

 

박철순의 새로운 전설은 이때부터였다. 1990년 7월 5일 해태전에서 5-0으로 1500일 만의 완봉승을 거두고는 1991년부터 1994년 매년 7승을 기록했다. 1992년 10월 9일 해태전에서 다시 완봉승을 거두는데 이것이 당시 한국 프로야구 최고령 완봉승 기록(36년 5개월)이었다. 1993년 8월 21일 빙그레전에서는 6타자를 연속으로 삼진으로 돌려 세웠는데 이것은 당시의 연속타자 삼진 기록과 타이었다. 그리고 열흘 뒤 해태와의 경기에서는 개시와 동시에 2이닝동안 1번 타자부터 6명을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워 경기 개시 연속 삼진 기록을 세웠다. 1994년 7월 8일 삼성 전에서 개인 최다인 한경기 11탈삼진을 기록하며, 10회 연장까지 이어진 승부에서 완투승을 기록, 연장전 최고령 완투 기록을 수립했다. 8월 12일 태평양과의 경기에서는 다시 완봉승을 기록, 자신이 갖고 있던 현역 최고령 완봉승 기록을 38세 5개월로 연장시켰다. 1995년 4월 19일 LG전서의 승리로 7연승을 기록하며 최고령 연속 경기 승리 신기록(39년 1개월 7일)을 수립하며, 이 시즌 9승 2패를 기록, OB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공헌했으며, 10월 20일에는 13년만에 한국시리즈에 등판해서 한국시리즈 최고령 등판 기록을 세우고(39세 7개월 8일), 끝내는 우승, 13년 만의 우승을 차지하고는 후배들을 끌어안고 어린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려 많은 야구팬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1996년 7월 30일 LG전에서는 세이브를 기록하여, 최고령 세이브 기록(40세 4개월 18일)을 세웠으며, 9월 4일 한화전 승리로 최고령 승리 투수 기록을 40세 5개월 23일로 연장시켰다.
 
기록의 사나이, 불사조, 한국야구의 산증인으로 한국야구의 역사와 영욕을 같이해왔던 거인 박철순은 결국 세월의 흐름앞에 42세에 이른 1997년 4월 29일 LG전이 끝난 후 공식 은퇴식을 갖고, 선수생활을 마감했으며, 그의 백넘버 21번은 2002년 4월 5일 두산베어스의 영구결번으로 남아, 잠실 구장 한켠에 그의 이름과 함께 남아있다. 

 

 

 

 

 

 

프로 스포츠는 스타를 필요로 한다. 특히 새롭게 출범하는 종목은 세간의 관심을 끌어모을 수 있는 슈퍼스타의 존재가 절실하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열세로 꼽혔던 팀에 예상치 못한 선수가 미국에서 합류하며 놀라운 활약을 펼쳤고, 기량은 물론 외모까지 준수해 엄청난 인기몰이를 했다. 그가 박철순이다. 이러한 박철순의 존재는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하던 해부터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은퇴경기를 보러 대학교 2학년이던 시절, 시험 두 과목을 펑크내고 잠실야구장으로 갔다. 경기는 엉망이었다. 박철순은 등판하지 않았고, 두산은 서울 라이벌이라는 LG에 맹폭당하며 10점 이상을 실점하고 대패하고 말았다.  스포츠는 이벤트가 아니기에, 경기에 최선을 다한 LG를 뭐라할 수 없지만, 박철순이라는 상징적인 영웅을 보내는 마당에 실력 이상의 플레이를 보이는 LG가 너무나 미웠다. 그리고 공 하나조차 던지지 않고, 경기가 끝난 뒤에야 마운드에서 볼을 뿌리는 선수 박철순을 보며 작은 아쉬움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중에야 알았다. 박철순의 몸은 이미 공을 던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운동 선수가 아닌 일반인보다도 기능이 떨어진 허리와 아킬레스 건의 핸디캡을 안고 마운드를 지키면서, 그의 어깨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 상황이었다.

 

고인이 된 하일성 해설위원이 언젠가 경기 중에 박철순이 145km/h 의 볼을 뿌리자 "저 박철순 선수가 140을 넘기는 스피드로 볼을 던진다"며 목 메여 했던 장면이 있었다. 노장의 투혼에 가슴이 먹먹해졌을까? 하지만 미국에서는 놀란 라이언이 불혹을 넘긴 나이에 시속 160을 넘긴 적도 있기에 크게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하지만 박철순에게는 그 이상의 것이 존재했다. 

 

노장 박철순은 와인드 업 후 유독 키킹을 높이 해서 발을 머리 위까지 끌어 올려 공을 던지곤 했다. 박찬호가 LA 다저스 입단 초기에 했던 투구 폼과 비슷했다. 박철순의 어깨는 이미 그 때에 망가진 상태였다. 제대로 된 볼을 던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발을 높이 들어 올려, 발이 내려갈 때의 속도와 탄력을 이용해서 몸에 회전을 가져와 볼에 스피드를 붙였다고 한다. 정상인처럼 걷기조차 힘들다는 그 왼발을 들어 올려서 강하게 땅에 내려 꽂고, 디스크에 이은 세 차례의 부상으로 그를 괴롭혔던 허리를 회전 시키며, 그렇게 볼을 미트에 꽂아 왔던 것이다.

 

은퇴 후, 올스타전에 앞서 열린 올드 스타전에 웃으며 등판했던 박철순이 던진 공은 상대 타자들에게 계속해서 맞아 나갔다. 하지만 그런 결과는 중요치 않다. 박철순이 마운드 위에 올랐다는 것 자체로 의미가 된다. 그 자리에 박철순이 존재하는 것 만으로 야구가, 또 스포츠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감동과 눈물을 선사할 수 있는지 증명되는 것이다.

1982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순간 마운드에서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기뻐하던 그 환한 웃음과 13년을 기다려 얻어낸 두번째 우승에서 후배들을 부둥켜안고 목놓아 통곡하던 모습은 팀의 프렌차이즈와 에이스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제 그도 칠순을 넘긴 노인이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던, 그는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에이스로 남아 있을 것이다. 잠실 야구장에 울려 퍼질 때마다 팬들의 가슴을 적셔왔던 권인하의 '에이스를 위하여'와 프랑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와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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