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대표하는 전통의 축구 강호 독일. 우리는 '전차군단'이라고 부르지만, 실제 독일 축구 대표팀을 칭하는 별명은 '만샤프트(Die Mannschaft).' 독일은 FIFA 월드컵에서도 빛나는 전통을 갖고 있다. 4회 우승을 차지하며 최다 우승국인 브라질(5회)에 이어 이탈리아와 함께 두번째로 많은 우승을 차지했다. 결승 진출은 8회로 월드컵 파이널에 가장 많이 오른 팀이며 준우승 횟수 역시 가장 많다. 유럽 최고의 팀을 뽑는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도 결승에 가장 많이 진출해(6회), 스페인(4회)에 이어 두 번 째로 많은 우승(3회)을 차지했다.
이러한 빛나는 전통을 갖고 있는 독일 축구국가대표팀의 역사에서 위르겐 클린스만(Jürgen Klinsmann)은 확실한 족적을 남긴 선수였다. 유구한 독일 축구의 역사에서 2000년 이전에 국가대표를 떠난 선수 중 클린스만보다 국가대표 경기를 더 많이 뛰었던 선수는 없다. 동시대에 독일 대표팀의 상징과도 같았던 로타어 마테우스(Lothar Matthäus)에 의해 가려졌고, 2000년 이후 많은 선수들이 클린스만의 기록을 넘어섰지만, 클린스만은 여전히 역대 독일 선수 중 A매치 출전 기록 9위(108경기)에 올라 있으며, - 그 위대한 베켄바워(Franz Beckenbauer/ 103경기)보다 더 높은 기록이다 - 1996년 유로 우승 당시 주장으로 팀을 이끌었으며, 47골로 독일 A매치 최다 득점 공동 4위에 올라있다.
1964년 독일 괴핑엔에서 출생한 클린스만은 4개국어에 능통한 코스모폴리탄답게 17세때 슈트트가르트를 시작으로 VFB 슈트트가르트, 인테르, AS 모나코, 토트넘, 바이에른 뮌헨, 삼프도리아 등을 거치며 명성을 떨쳤다. 한 팀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가 되지 못하고 저니맨처럼 여러 팀을 옮겨다녔는데, 기량 문제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Zlatan Ibrahimovic) 처럼 자신의 가치를 직접 PR하는 선수였던 클린스만은 에이전트보다 전면에 나서서 이적 협상을 진행할만큼 주체적이고 자신감이 넘쳤고, 여러 리그와 팀에서 기량을 입증했다. 1990년대에만 3번의 월드컵 본선에 나서 17경기 11골로, 역대 월드컵 최다득점 공동 8위에 올라 있다.
181cm 76kg의 신체조건은 현재 기준으로 볼 때 최전방의 붙박이 선수로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클린스만은 정통 스트라이커로서 강력한 슈팅과 뛰어난 센스, 그리고 탁월한 골감각과 유연성을 갖추고 있다.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으면 더욱 위력을 자랑했던 미로슬라프 클로제(Miroslav Klose)가 2000년대에 들어 독일 스트라이커의 거의 모든 기록을 새로 썼지만, 그 이전까지 클린스만은 게르트 뮐러(Gerd Muller), 리트바르스키(Pierre Littbarski) 등과 함께 독일 역사에 가장 뛰어난 공격수로 인정 받았다. 월드컵과 유로를 모두 우승하며 독일 대표팀의 찬란한 시기를 이끌 당시에는 마테우스, 안드레아스 브레메(Andreas Brehme)와 함께 게르만 3총사(The German Trio)로 불렸다. 이들은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이탈리아 세리에A의 인테르, 그리고 서독 시절 포함 독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어떤 이들은 '페널티박스의 다이버'라는 별명을 들며 그를 비판하지만, 당시로서는 페널티박스에서 심판에게 페널티킥을 불게 하는 것도 선수에게 필요한 능력 중 하나였다. 물론 페이플레이 정신에 입각했을 때, 작은 접촉에도 마치 죽을 것처럼 데굴 데굴 구르고, 파울이 아닌 상황에서 부당하게 기회를 얻어낸 부분을 마냥 칭찬할 수는 없다. 하지만 히바우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루이스 수아레스, 해리 케인, 브루노 페르난데스 등 이러한 논란이 따라다니는 선수들은 하나 하나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하지만 이들이 논란 이상의 기량과 활약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 처럼 클린스만 역시 확실히 그런 모습을 보였다.
87/88시즌 분데스리가 득점왕에 오른 그는 1988년 유로 준우승과 서울올림픽 동메달의 견인차 역할을 한다. 이러한 활약으로 1988년 독일 최우수 선수에 선정되고, 이듬해 인테르로 적을 옮겨 13골을 터뜨렸으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루디 푈러(Rudi Voller), 리트바르스키와 공격 선봉을 맡아 독일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조별 예선부터 물오른 득점 감각을 자랑하며 5골을 기록했으나, 독일이 8강에서 스토이치코프(Hristo Stoichkov)를 앞세운 불가리아에 일격을 당하는 바람에 더 이상 토너먼트를 치르지 못하고 득점왕에도 오르지 못했다. 이후 EPL 토트넘으로 팀을 옮긴 그는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94/95시즌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선수에 선정된다. 95년말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한 그는, UEFA 컵서 15골이라는 대회 신기록으로 득점왕에 오르면서 팀을 챔피언에 등극시켰으며, 1996년 유럽선수권대회에서도 예선 10경기에서만 9골을 터뜨리는 폭발력을 과시했고 주장으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녹슨 전차 구단'의 저주가 시작되던 시점의 독일이 부정적인 평가를 뒤집고 우승을 차지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998년 34살의 나이로 독일의 주장 완장을 차고 나선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노장임에도 불구하고 녹록치 않은 실력으로 중요한 고비때마다 결정적인 골을 터뜨리며 팀을 위기에서 구했으나, 94년 불가리아에 이어 이번에는 수케르(Davor Suker)가 이끄는 크로아티아에게 0-3으로 완패를 당하며 12년간 활약했던 대표팀 생활을 마무리 한다. 35세의 나이로 그라운드를 떠나 은퇴를 했지만, 그를 원하며 열광하는 수천만의 팬들의 성원에 의해 1999년 호주 시드니에서 열렸던 세계 올스타전에 뽑혀서 출전 하기도 했다.
클린스만의 득점장면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뛰어난 스트라이커였는지를 알 수 있다. 클린스만에게 질풍같은 돌파와 그림같은 개인기, 폭발적인 스피드로 상대 수비수를 따돌리는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인정받았다. 화려한 발재간과 폭발적인 돌파력을 가진 선수가 아니어서 드라마틱한 과정을 연출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아크로바틱에 가까운 피니시 능력은 클린스만이 공격수로 왜 대단한 선수였는지를 증명한다. 찬스에 강했고, 위치 선정도 뛰어났다. 골을 위해서는 양 발과 머리, 모두 가리지 않았다. 그의 전매특허와도 같았던 화려한 시저스 킥은 주발을 무시하고 양 발 모두 그림같은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1991년 인테르에서 뛸 당시 아탈란타와의 경기에서 왼쪽에서 올라온 크로스를 달려들면서 러닝 시져스 킥으로 골대에 꽂아 넣은 장면이나, 1994년 미국 월드컵 우리나라와의 경기에서 전반 초반 헤슬러(Thomas Häßler)의 땅볼 패스를 오른발로 띄우고 회전 발리킥으로 연결한 득점 장면들만 봐도 그의 동물적 감각과 골을 넣는 타고난 재주를 확인할 수 있다. 34세의 나이로 출전한 미국 월드컵서도 40여미터를 날아온 크로스를 가슴으로 정확히 컨트롤 하여 상대 주장 선수를 제치고 득점하는 장면, 이란전서 골대에 강하게 맞고 튀어나온 볼을 데쉬하던 중 점프하면서 머리를 정확히 갖다대던 장면, 멕시코전서 상대 수비가 놓친 공을 당대 최고 골키퍼중의 하나였던 캄포스(Jorge Campos)의 방향을 완벽히 뺏으면서 슬라이딩 골로 연결하는 장면에서 3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의 화려한 플레이를 보였다. 숱한 이적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몸 담은 팀에서 꾸준히 두 자릿 수 득점을 올렸고, 97/98시즌 삼프도리아에서는 8경기 2골로 부진한 듯 했지만 토트넘으로 임대되자마자 15경기 9골을 터뜨리며 은퇴 무렵에도 녹슬지 않은 결정력을 과시했다.기량도 뛰어났지만, 준수한 외모와 스타성이 넘치는 성향 및 인터뷰 능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클린스만에게 다이버라는 별명으로 가장 강도 높은 비난을 퍼부은 것이 영국 팬들이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결승에서 클린스만은 페드로 몬손(Pedro Monzón)의 태클에 걸린 후,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볼 법한 말도 안되는 액션으로 뒹굴었다. WWE에서도 상대의 피니셔에 맞은 뒤 더 락 정도나 보여줄 법한 찰진 액션이었다. 하지만 주심은 몬손을 퇴장시켰다. 그는 월드컵 결승에서 퇴장 당한 최초의 선수가 됐다. 2년 뒤 UEFA 챔피언스리그 4강, AS 모나코와 AC 밀란과의 경기에서는 접촉이 없었음에도 심판의 오심을 유도하여 코스타쿠르타(Alessandro Costacurta)에게 두번째 옐로카드에 의한 경고를 선사했다. 영국 축구팬들은 그렇지않아도 꼴 보기 싫은 독일 선수가 이런 모습으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을 참지 않았고, 언론이 앞장 서서 클린스만을 비열하다고 비난했다. 그런데 이 상황에 클린스만은 토트넘으로 이적을 했다. 전세계에서 클린스만을 다이버라고 가장 크게 성토하고 있던 영국으로 향했다. 토트넘 팬들조차 클린스만에게 냉소적이었지만, 그는 시즌 개막전이었던 셰필드 웬즈데이와의 경기에서 EPL 데뷔골을 터뜨렸고, 그라운드에 몸을 던져 다이빙을 하는 퍼포먼스로 골 세리머니를 펼쳤다. 이러한 위트는 비난 여론에 반전을 가져왔고, 다음 홈 개막전에서는 에버튼을 상대로 원더골을 터뜨렸다. 시즌 21골을 터뜨리며, 테디 셰링엄(Teddy Sheringham)과 강력한 공격진을 형성했고, 토트넘은 물론 영국 전체의 비난을 찬사로 바꿨다. 종전 이후 영국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자신의 힘으로 가장 버라이어티하게 반전시킨 독일인이다.
클린스만은 지도자로 변신한 후 놀라운 성과를 냈다. 독일 대표팀의 전성기가 궤멸적으로 무너지던 2004년, 코치 경력조차 일천했던 클린스만은 독일 대표팀 감독으로 깜짝 발탁됐다. 그리고 대표팀을 맡자마자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다. 게르만 정신으로 포장된 순혈주의가 철칙과도 같았던 독일에서 클린스만은 흑인 선수를 발탁했다. 코치진에도 미국인 체력 코치를 선임했고, 대표팀의 붙박이었던 올리버 칸(Oliver Kahn)을 내쳤다. 클린스만 이후 독일은 혼혈, 이중 국적, 이민자 출신인 선수들에게 문을 열게 됐다. 클린스만이 준 변화가 아니었다면, 후에 클로제나 루카스 포돌스키(Lukas Podolski), 사미 케디라(Sami Khedira), 메수트 외질(Mesut Ozil)이 독일 대표로 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후에 클린스만을 강하게 비난했던 필림 람(Philipp Lahm)을 발굴한 것도 클린스만이었다. 클린스만은 람을 비롯해 메르테사커(Per Mertesacker), 메첼더(Christoph Metzelder) 등을 대표로 발탁해 독일 대표팀의 문제였던 절망적인 수비라인을 재건했고, 칸을 밀어낸 골키퍼 자리에는 옌스 레만(Jens Lehmann)을 선택했다. 그리고 위기감이 팽배했던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2년 만에 독일이 부활해 3위에 오르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여기까지다. 월드컵에서의 찬란한 성과를 뒤로 하고 돌연 사임한 클린스만은 이후 바이에른 뮌헨을 맡았지만 마땅한 성적을 내지 못했다. 21세기 이후 뮌헨을 맡았던 정식 감독 중 유일한 무관이었다. 미국 대표팀을 이끌고 나선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독일, 포르투갈, 가나와 한 조가 되는 불운 속에서도 본선 토너먼트에 오르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었지만 이후 북중미 골드컵과 2018 러시아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의 부진으로 경질됐다. 이후 헤르타 BSC의 감독이 됐는데 괄목할만한 성적을 내지 못했고, 자신의 개인 SNS 라이브를 통해 감독직에서 물러난다고 단독 발표하면서 비난을 받았다.
이런 가운데 클린스만은 갑자기 우리나라 대표팀 감독을 맡았고, 선임 과정과 아시안컵에서의 실패로 뭇매를 맞았다. 이미 선임 전부터 클린스만은 국가대표팀에 대한 기대치가 엄청나게 높은 우리나라 축구 팬들에게는 인정할 수 없는 후보군의 인사였다. 전술 부재와 코스모폴리탄 답지 않은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이 지적됐고, 아시안컵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으로 탈락하자, 결국 중도 경질됐다. 1994 미국 월드컵에서 우리나라를 상대로 멀티골을 넣었을 때도 특별히 욕을 먹지 않았던 클린스만인데, 지금은 한국 축구팬들에게 거의 볼드모트 급의 금지어가 되어버렸다. 선수 시절의 그를 너무나 좋아했던 나로서는 씁쓸하고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현역 시절, 놀라운 마무리로 상대의 골망을 가르고, 금발을 휘날리면서 환하게 웃으며 팔을 벌리고 힘차게 달려나오던 클린스만의 득점 세리머니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FIFA 월드컵 역사 비디오의 한 켠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윋한 선수. 위르겐 클린스만...
'fAntasize | 글 > fOcus' 카테고리의 다른 글
[Poet] 윤동주 - 끝내, 가슴 속의 별을 다 헤지 못했지만... (0) | 2025.05.14 |
---|---|
[Tennis] 스테판 에드베리 - 네트 위를 점령했던 코트위의 신사 (0) | 2025.05.09 |
[Baseball] 박철순 - 영혼을 던진 KBO 최초의 영웅 (0) | 2025.05.07 |
[Photographer] 유섭 카쉬 - 카쉬의 피사체가 되지 못했다면 명사라 할 수 없다 (0) | 2014.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