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시인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은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시 중 하나다.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이 시를 처음 보기 전에도, 라디오에서, 특히 그 시절 가장 인기가 많았던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도 숱하게 들을 수 있었던 시이며, 특히 '별 하나에~'로 반복되는 구절은 시와 역사에 전혀 관심 없는 문외한에게도 익숙할 것이다. 일제 시대의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시인 윤동주는 1917년 중국 길림성에서 태어났고, 일본에서 유학 중에 체포되어 1945년 2월 16일, 조국의 독립을 6개월 남기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대표적인 민족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생전에 발표한 시집은 없다. 1948년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발행됐고, 이후 판본이 거듭되면서 유고를 보충했다.
독립운동을 헸던 시인들의 시는 비교적 짧다는 느낌이 있었다. 윤동주의 <서시>, 이육사의 <광야>, 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 등, 몇 번 읽으면 쉽게 외울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교과서에서 본 윤동주의 <별 헤는 밤>과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상당히 길었다. 어린 시절의 허영과 전문을 외우면 시험 때 유리하다는 생각에 무턱대고 다 외웠던 기억이 있다. 다소 이질적인 것은, '별 하나에~'로 반복되는 구절이 아련함과 추억을 떠오르게 하고, 때로는 연서의 일부처럼 차용되기도 했던 일반의 사용과 달리, <별 헤는 밤>이라는 시는 사뭇 다른 무게감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아주 어릴 적부터 글을 쓰면서 장난 치는 것이 익숙했다. 언젠가부터 상을 받는 데에도 가장 유리한 것이 글쓰기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책 읽기와 글쓰기는 공부와 분명 다른 영역이었다. 무언가 잘하고 싶을 때, 내가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도구는 독후감이든 글짓기든, 그냥 글을 쓰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을 소재로 3학년때부터 6학년때까지 똑같은 백일장 대회에 내용과 수식어만 조금씩 바꿔서 제출했고, 상을 받았다. 어린 나이에 '이렇게 하면 상을 받는다'는 방법을 알았다. 그러다가 글을 길게 쓰는 게 지겨웠다. 당시에는 '산문'과 '운문'으로 구분해서 글짓기 대회나 백일장이 개최됐다. 어차피 같은 상인데, 긴 시간을 들이는 것은 지루한 일이었다. 그래서 시를 써서 운문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제출수 구분이 없을 때는 산문, 운문을 다 낸 적도 있었고, 쓰는 걸 귀찮아하는 친구들의 글을 대신 써 준 적도 있었다. 학교 다니면서 받은 유일한 상이 내가 대신 써준 시라는 친구도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생활기록부에 '염세적'이라고 적힐만큼, 뭔가 정상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은 학생이었던 나는 늘,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 있었다. 솔직히 '갓 10살 먹은 아이가 삐뚤어져봐야 얼마나 어긋났을까' 싶기도 하지만 선생님이 '비관적'도 아니고 '염세적'이라고 적은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 아무튼 자기 연민의 원인은 지금도 모르겠지만, 늘 갈구하고 희망하는 것은 내 의지 밖에 있다는 생각이 강했고, 나는 그저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쓴 일기에 '나는 이번의 삶을 박진호라는 존재로 살다가 시들어, 다음 생에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때까지, 남들이 바라는대로 있으면 된다'고 적어, 담임 선생님이 어머니를 호출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무미건조한 인간이었던 내게 '참으로 쉬운 글쓰기'는 자아 충만의 도구였다. 그런데 중학생 때 본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는 그러한 나의 허영을 박살냈다.
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詩가 이렇게 쉽게 씨워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게 글쓰기였고, 그 중에서 시는 시간도 단축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도구였다. 쓰는 이유는 다양했다. 상을 받기 위해, 시간을 때우기 위해, 공부하기 싫어서 수업시간에 다른 짓을 하기 위해, 혹은 욕구 불만의 심리 상태를 어떻게든 폭발시키기 위해... 여러 동기에 의해 참 많은 시를 끄적였고, 필요에 의해 수상을 하고 칭찬을 받는 일련의 과정은 어쩌면 나의 가치를 인정받는 의식과도 같았다. 하지만, 스물 다섯살의 윤동주는 쉽게 씌여지는 시가 부끄럽다고 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고, 윤동주라는 시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그가 쓴 시는 어떤 것들이 있는 지를 찾아보게 됐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처음 읽은 것이 이 때였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사춘기를 거치던 학생의 마음을 간지럽힐 수 있는 표현이 참 무거운 분위기의 시 한복판에 틀어박혔다. 행마다 들어찬 묵직함이, 겉멋의 허영을 즐기던 시기의 철없는 혀 끝에 쉽게 담으며 치장하기 좋을 법한 단어와 표현들로 가득찼다. 그 숭고한 단어의 쓰임과 복잡하게 엮지 않은 은유가 시인의 처절함과 공허함을 조용한 절규로 표현하고 있음을, 그리고 강렬한 열망을 감싸고 있음을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연습장에다가 최대한 의미를 함축해서 낙서를 적던 교만과 허영은 산산이 부서진 뒤였다.
'가엾다가 미워지고, 그러다가 그리워지는 우물 속 그 사나이'가 나에게는 거울 속에서 마주하는 매일의 그 모습과 같았던 것인지, 아니면 그가 그린 <자화상>은 감히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훨씬 넓은 세계를 표현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가 만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공간 안에서는 어떠한 격정도 차분함을 잃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시에는 '가을'과 함께 '부끄러움'이 자주 등장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지만, 그에게 '하늘은 부끄럽게 푸르렀고', 그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했다.' 어쩌면 이 또한 연민이라 할 수 있을까?
한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외롭다 말하지는 않지만, 그의 시 곳곳에는 외로움의 절규가 묻어난다. '평생을 외롭게 지내 외로움에 힘들다는 것은 사치다. 외로움은 익숙해서 낯설지 않은데, 나를 항상 무너지게 하는 것은 그리움'이라고 주장해 왔는데, 숱하게 나를 무너뜨리는 그리움도 결국 외로움의 다른 이름은 아니었을까.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라는 말은 세상의 괴리에 더욱 내몰리고 초라해지는 자신을 볼 때, 피할 수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루를 마친 늦은 밤, '매일 매일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면서, 외로움에 처연하게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든 이유가 내가 아닌 다른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막막함에도 그는 끝없이 돌아보고 참회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칠 지언정, 다른 이들에게는 '어둡더라도 눈 감고 가거라'라고 말하고 있다.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길이 통할 것이라며 응원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며 주어진 길을 걸어간' 그의 유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너무나도 푸르게 무성하다.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던 최후의 윤동주'는 끝내 조국의 독립을 끝내 보지 못하고 스물 여덟에 숨을 거뒀지만, '시인 윤동주'의 이름은 한 세기를 넘어서도 당당히 전해지고 있다. 자신이 사는 이유를 '잃은 것을 찾는 까닭'이라 했던 윤동주는 끝내 되찾은 조국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그 호흡은 남아, 유형을 넘어 존재하는 당신의 시간이 이제는 더 이상 <무서운 시간>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위명과 가치가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웠는지, 중국과 일본마저 흠모함이 지나쳐 그의 국적을 훔쳐가려 한다.
중국은 그를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이라 주장한다. 윤동주가 중국 길림성에서 태어났고, 그의 묘소도 그곳에 있으니, 무지하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윤동주는 단 한 순간도 중국인으로 산 적이 없다. 윤동주는 그의 시 <고향 집>에서 '남쪽 하늘 저 밑엔 / 따뜻한 내 고향 / 내 어머니 계신 곳 / 그리운 고향 집'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표현한다. 중국은 '두만강을 건너서 온 쓸쓸한 땅'이라고 하며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라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하게 그리고 있다. 지금의 연세대학교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지은 <별 헤는 밤>에서는 '佩、鏡、玉 이런 異國少女들의 일홈'이라며, 중국에서 보낸 학창시절 소학교 시절의 중국인 친구들을 '이국소녀'라고 명시하고 있다.
중국은 '조선족'을 '민족은 조선민족이며 국적은 중화인민공화국'이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에 건국했고, 윤동주는 1945년에 사망했다. 윤동주가 살아있는 동안 '중국'도 없었고. '중국 조선족'도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족'이라는 단어는 중국 공산당이 만들어낸 민족 구분이다. 중국은 윤동주가 살았던 시기(당시 청나라)의 간도에 대해 제대로 된 정치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이후 중화민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윤동주는 중화민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 오히려 윤동주의 본적지는 지금의 북한 지역인 함경북도 청진부로 되어 있다. 또한, 그를 체포하고 구속했던 일본은 그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하면서 '대단한 민족의식으로 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깊은 원망을 갖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했다'고 판결했다. 그는 조선인이었다. 윤동주의 가족들과 후손들도 해방 이후,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한편, '시인 윤동주'는 일본에서도 명망이 높은데, 그가 유학했던 교토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学)에는 1995년 2월에 그를 추모하는 시비(詩碑)가 세워졌으며, 그가 체포되기 전까지 활동한 것으로 전해지는 교토 우지(宇治)에는 일본인들로 구성된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에서 세운 윤동주 시비 '기억과 화해의 비'가 자리잡고 있다. 일본에서 윤동주의 시를 사랑하는 이들은 청년 윤동주의 순수함과 고뇌에 공감하고 그가 겪었던 역사적 비극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며, 그의 시가 미래를 향한 평화와 화합의 기틀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일부 일본인들은 이러한 윤동주가 일본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반론도 사치다. <쉽게 씌어진 시>에서 윤동주가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고 힘주어 명시한 것은 이런 때의 그들에게 보여주는 메시지가 아닐까? 총칼을 들고 일제에 맞서 싸우지는 않았지만, 지식인으로 평생 고뇌하며 독립을 꿈꿨고, 일본이 말살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우리 말과 우리 글로 처연함과 아름다움을 전한 윤동주의 시는 힘든 시기를 버티고 극복한 우리의 민족 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 우리는 '글의 힘'으로 민족의 정신과 정서를 지킨 그가 내민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를 결코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의 국력과 역사가 바름을 되찾아 '내 한 몸 둘 하늘'을 우러르던 자랑스런 시인의 영혼을 편히 모실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fAntasize | 글 > fOcu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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