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신이 이렇게 어렵구나. 참 잔인하다.
정치 성향 검사에서 당당하게 '보수'라고 나옴에도 '자칭 보수 정당'인 국민의힘을 지지하지 못하는 나에게, 이번 대선은 대한민국에 지금껏 기형적으로 존재하던 보수가 바르고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줬다.
이길 수 없는 선거였다. 국민의힘이 배출한 대통령이 불법 계엄을 일으켰다가 탄핵됐다. 국민의힘으로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자당 출신 대통령이 2회 연속 탄핵을 당하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비극을 맞이하게 됐다. 개인 비리 여부에서 다툼의 여지가 있었던 박 전 대통령에 비해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사유는 너무도 명확했다. 문형배 헌법 재판관이 대독한 판결문의 문장 하나 하나가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명료했고,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여전히 계엄은 합법이고, 탄핵은 잘못됐으며, 윤석열은 대통령이어야 하고, 선거는 부정이었으며, 헌법재판소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반민주적 궤변에 편승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국가 이념으로도, 또 종교적으로도 도저히 용납하고 인정할 수 없는 전광훈과 그 일당들의 손을 잡았고, 몰상식하게 대선에 나서면서 과정에서도 파렴치한 모습을 이어갔다. 경선을 통해 선출한 후보를 흔들고, 강제로 단일화를 압박했으며, 새벽에 후보 바꿔치기를 시도했다. 그것이 '당원들의 뜻'이라며 '민주적 절차'라고 당당히 외쳤지만, 당원 투표에서 부결됐다. 블랙 코미디다. 그런데, 그런 압박에서도 살아남은 후보는 다른 당의 후보한테 유세 마지막날까지 단일화를 요구했다. 집단적으로 미친 것 같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한정치산자 수준이 이어지고 있으니 철저하게 외면당할 것이고, 갈갈히 찢길 거라 생각했다. 말로가 비참할수록 철저하게 쇄신할 수 있다. 어차피 보수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중 하나인 과정의 공정과 이념의 명료성에서 어긋난 정당이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똑같이 국부라 칭한다. 왕조의 선대왕 둘을 신봉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박정희를, 박정희는 이승만을 경멸했다. 이승만은 박정희를 '공산주의자'라 규정하고 군에서 내쫓으려 했고, 박정희는 이미 이승만 정부를 향해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1960년 4.19 혁명에 의해 이들의 전면 대립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승만 정부를 향해 군부 쿠테타를 준비했던 박정희는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가 취임한지 9개월만에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했고, 군부 독재를 이어갔다. 서로를 적대했던 이 둘을 국민의힘과 그 지지자들은 같은 선상에 두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민주당이 탄핵했다고 한다. 그 탄핵은 국민의힘의 전신인 새누리당이 협력하지 않았으면 국회도 통과하지 못했다. 299명 중 234명이 찬성했다. 당시 국회 측 탄핵소추위원장은 권성동이었다. 그는 박 전 대통령 탄핵 심판의 최후 진술에서 "대통령 파면을 통해 정의를 갈망하는 국민이 승리하였음을 소리 높여 선언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말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특검에서 수사하고 유죄를 이끌어 낸 것이 박영수 특검의 수사 팀장이었던 윤석열이었다. 그런데 국민의힘은 윤석열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고, 2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도록 했다. 박근혜 구속이 파렴치한 정치공작이라면서, 윤석열은 정의로운 검사 출신이라고 강조한다. 윤석열의 박근혜 수사는 그럼 무엇인가? 정의로운 검사의 파렴치한 수사였나? '박근혜에 대한 윤석열의 수사'는 이들에게 금지어다. 잘못인지 아닌지 말을 못한다. 그저 '억울하신 우리 박근혜 대통령'이고 '정의로운 우리 윤석열 대통령'이다. 국민의힘에게는 박근혜도 옳고, 윤석열도 옳다. 박근혜도 억울하고, 권성동도 억울하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똑같은 선상에 있는 것과 같다. 이 논리면 고려 공양왕과 태조 이성계도 같은 선상의 베스트 프랜드다. 가장 합리적이고 냉정해야 하는 현실 정치의 영역에 신앙 수준의 교리가 존재한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정치 영역에서 이러한 논리 모순은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드신 수령님 찬양과 중국 공산당 외에는 본 기억이 없다.
부정 선거를 주장한다. 크게 이길 선거를 고작 0.7%로 이겼다며, 너무 차이가 벌어지니까 그 정도 패배로 조작했다고 한다. 스포츠 토토도 아니고, 승패 외에 의미가 없는 제로섬 게임에 어이없는 의미를 부여한다. 선거관리위원회를 믿지 않는다. 김문수 후보도 선관위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그러면 선거에 나오면 안되는 거 아닌가? 부정 선거를 의심하면서 투표 참여를 독려한다. 제주 4.3 사건이 공산당의 폭동이었다면서 참배하러 가서는 "건국 과정에서 일어난 아픔이고 무고하게 희생된 분들이 많다"고 했다. 그러나 유족이 사과를 요구하자 끝까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자가당착 투성이 속에, 오직 내세우는 것은 '상대가 나쁘다'는 것 뿐이고, 자신들의 잘못은 사과 한 마디 없이 억울하다고만 한다. 그러면서 잘못과 오류가 발생하면 그것조차 상대방 탓이다.
사대주의적 역사관을 갖고도 '보수'라 자칭하는 세계 유일의 정당이지만, 정체성 자체에 암적 문제가 너무 크다. 일론 머스트가 도널드 트럼프의 감세법에 대해 언급한 것을 국민의힘에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Disgusting Abomination!
그들은 자신들이 무너지면 이 땅에 보수가 사라지고, 민주당이 권력을 독점하여 독재를 통해 나라가 북한이나 중국같은 공산국가가 될 거라고 주장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일찌감치 몰락한 이 시점에 '공산당=김일성 북괴' 라는 것 이상의 논리와 개념도 학습하지 못한 사람들을 가스라이팅하고, 이걸 또 철석같이 믿는 이들이 넘쳐난다.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얻는다는 걸, 뼈아프게 증거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지만, 북한이나 중국같은 논리 모순을 발설하고 있는 이들은 국민의힘이다.
국민의힘이 사라져도 보수는 죽지 않는다. 범민주가 차지한 190여 석의 의석 중 최소 50석은 무능하고 역겨운 국민의힘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반대쪽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선택이었다. 민주당이 잘해서 주어진 의석이 아니다. 국민의힘이 사라지고 범민주의 영역이 넓어질 것 같으면, 민주당에게 주어진 보너스 의석은 국민에 의해 사라진다. 새롭게 보수의 기치를 말하는 이들이 등장하고, 그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면서 보수는 거듭나고 정치 권력은 재편된다. 보수의 가치를 신봉하는 국민에게는 아프지만 이러한 순환이 건강한 진화이고 발전이다. 하지만 국민의힘 기득권 세력들은 이를 용납할 수 없다. 그들에게 새롭게 등장하는 이들은 '참보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국민에게 설파하는 '보수'의 의미는 그냥 '나'다. 그래서 국민의힘이 사라지면 보수가 죽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책임도 없고, 희생도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1년 지나면 그냥 다 잊을 거고, 나는 야당하기 싫고, 정권 내주기 싫은 기득권이다. 그렇게 당당하게 말해도 나는 또 부활할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을 순교자처럼 갖고 있다. 대한민국 정치의 이단들이다.
그래서 이들이 박멸되어야 한다. 보수가 바로 서야 대척점에 있는 진보도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다. 진보의 방향과 척도는 보수를 기준으로 한다. 그런데 보수가 엉망이니 진보도 정상일 수 없다. 한국 정치의 비극이다. 이번 대선은 딱 좋은 기회였다. '보수'라는 이름으로 국민을 속이고 있는 늙고 교활한 정치 사기꾼들을 축출하고 보수가 바로설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이 썩어빠진 집단이 멸망을 피했다. 변명의 여지 없는 참패 속에 이들이 절멸되어야 새로운 세대와 희망이 응집될 수 있을텐데, 너무 어중간한 결과가 나왔다. 모두에게 변명이 가능하다.
김문수와 그 지지층은 "계엄과 탄핵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치러진 선거였음에도 무려 40% 이상을 득표했다. 이는 김문수라는 인물이 얼마나 국민에게 소구력이 있는 인사인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김문수, 김재원 등과 밀접한 관계인 전광훈 일당들은 여기에 줄을 대려 할 것이고, 절대적으로 세력이 부족한 김문수 측은 이를 끌어 안을 것이다. '보수'라 자칭하던 이들이 전광훈 일당들에게 더욱 오염되는 것이다.
권성동, 권영세, 나경원, 윤상현 등, 국민의힘을 쓰레기로 만든 기존 기득권들은 다른 해석 속에 존재감을 과시할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도 타락한 인간은 한심할 수밖에 없다는 걸 증명하고 있는 김민전, 이수경 같은 인물들이 속속 군집할 것이다. 국민의힘의 텃밭이었던 TK, PK, 강원에서는 이겼다. 이들은 "탄핵의 험난한 상황에서도 우리 지역구는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의 지역에서 이토록 인정을 받고 있기에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패인은 다른 곳에서 찾을 것이다. 이재명은 성남시장, 경기도지사 출신이고, 김문수 역시 경기 부천의 3선 의원이었으며 경기도지사를 역임했다. 그런데 경기도에서 14% 이상 차이가 났다. 무려 130만 표 이상 뒤졌다. 이재명과의 차이 중 45.5%가 경기도에서 나온 결과다. 정치적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지역에서 이렇게 참패한 것은 결국 '김문수라는 인물의 능력이 이재명에게 미치지 못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재명은 국민의힘과 그 지지자들에게 윤석열이 설령 내란을 일으켰더라도 정권을 주어서는 안되는 인물이다. 이재명이 집권할 거였다면 차라리 계엄이 성공하고 피바람이 불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그렇게 위험한 인물인 이재명한테도 못미친 김문수가 되는 것이다. '탄핵의 위기 속에서 기존 국민의힘 기득권 중진들은 자신들의 힘을 발휘해 지역구의 지지율을 지켜냈는데, 김문수가 무능해서 졌다'는 논리다. 대한민국 보수를 망친 국민의힘의 기득권들이 자신들을 위해 변명할 수 있는 구조가 완성됐다.
이제 이들은 자신들이 '이재명 독재'와 맞설 수 있는 '최선의 카드'임을 증명하기 위해, 지지층에게 보여주기식 정치로 일관할 것이다. 취임식에서 여야 대표 모두와 만난 대통령 앞에서 "여당이 추진 중인 법안을 재고하지 않으면 협치하지 않겠다"는 식의 발언을 한 김용태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대응이 이를 증명한다. 문제가 있는 법안이라 생각되면 여당과 협의해야 하고,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실력으로 적법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런데 취임한 대통령한테 가서 "못하게 해"라고 말한 것이다. 상식도 없고 기본적인 예의도 없다. 취임선서식에서 영부인의 인사를 무시하고, 자신의 거만하고 못난 성품을 숨기지 못한 권성동의 태도를 보면, 이들의 기본이 드러난다. 대통령이 당무에 개입하면 무슨 꼴이 나는지 스스로 증명해놓고도, 비대위원장의 첫 발언이 고작 그 수준이다. 이재명과 새정부가 무엇을 하든 다 나쁜 짓이고, 거기에 전면적으로 투쟁하고 대응하는 모습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겠다고, 지지층 40%에게 예고편을 보여준 것이다. 이들은 정부에 비협조로 나설 것이고, 내란 및 계엄 무효 투표 방해, 윤석열-김건희 비리, 고 채수근 상병 사망 사고, 명태균 게이트 등 각종 특검에 대해 '정치 탄압'이라고 맞설 것이다. 그것이 지지층에게 선택받는 방법이라 굳게 믿는다. 트럼프와의 대미 관세 정책에서도 충분히 미국편을 들 수 있는 이들이다.
이 와중에 한동훈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기존 당권파의 무능과 교활함을 지적할 것이고, 치열한 공방이 진행될 것이다. 차이가 크지 않았기에, 이들에 대해서도 국민의힘 기득권들은 "홍준표, 한동훈 등이 김문수를 열심히 돕지 않아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할 것이다. 선당후사의 희생과 노력이 없다고 비난할 것이며, 한덕수를 옹위하려 하고 당원들에 의해 진행된 경선을 무마시키려 했던 자신들의 반민주적인 행태는 '이재명을 막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고육책'이었다며, 스스로에 대한 쉴드에 적극적일 것이다.
이준석은 하필 8.34%의 특표율을 기록했다. 이재명-김문수의 차이와 거의 똑같다. 두 후보의 차이가 289만표고, 이준석이 얻은 표가 291만표다. 이들은 "이준석이 단일화를 하지 않아 이재명을 막지 못했다"며, "보수가 대선에서 패한 것은 이준석 때문"이라고 공격할 것이다. 국민의힘 기득권들은 '보수 내부의 적'이었던 한동훈계와 이준석계를 철저히 공격할 것이고, 한동훈계와 이준석계는 보수 패권을 위해 이들과 대립하면서도, 새 정부와 여당의 특검 등에는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국민의힘과 연대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결국 대한민국 '보수'라는 세력은 이런 난장판 속에 새롭게 거듭날 기회를 잃을 가능성이 크다. 계속 그렇게 가면, 결국 내년 지방선거도 지난 총선, 이번 대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로 귀착될 것이다.
8.27%차, 41.15% 득표. 대한민국 보수에게 너무 잔인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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