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 감독이 사임했다. 2023시즌을 앞두고 파격적으로 감독에 선임됐던 한국 야구의 슈퍼스타 이승엽은 자신의 임기 3년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야구계에서도 아쉬움이 클 것이다. 결과 여부를 떠나, 이승엽은 대한민국 야구계가 갖고 있는 엄청난 자산이다. 그런 이승엽이 은퇴 후 5년 만에 야구 현장으로 복귀한 만큼 명성에 어울리는 결과를 만들어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외부의 기대와 달리, 부임 후 꾸준히 이승엽에 대한 두산 팬들의 반응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승엽은 지난 두 시즌 모두 최종전을 마치고, 홈 팬들에게 야유를 들어야 했다. 사임의 가장 큰 이유는 팀 분위기와 성적 부진이다. 일부에서는 말한다. 애초 현재 전력이 리그 정상권이 아닌 두산을 데리고, 지난 두 시즌 이승엽이 이끈 성적은 나쁘지 않다고. 오히려 201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팀 전력에 대한 두산 팬들의 터무니없는 기대와 배타성이 이런 결과에 원인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타 팀 팬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그럼 너네가 데려다 써!"
두산 팬들은 왜 이승엽 감독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을까? 모른다. 잠실 야구장에 앉아서 두산을 응원한지 너무 오래됐다. 그들의 여론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 잘 모른다. 다만, 원년부터 두산의 전신인 OB를 응원하며, 한 팀만 40년 이상 지지해 온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답할 것이다.
1. 자부심의 실종
성적이 안 좋아서 이승엽 감독을 싫어했다는 건 비약이다. 지난 두 시즌의 결과 자체가 나빴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리고 2010년대에 워낙 좋은 성적을 거둔 효과로 비교적 근래에 유입된 팬들에게는 결과의 요소가 중요할지 모르지만, 올드팬 입장에서는 두산 앞에 붙은 '강팀'이라는 수식어가 퍽 낯익은 편은 아니다.
OB는 프로야구 원년 우승팀이다. 그게 다다. 이후 이 팀이 성적으로 빛났던 것을 찾기는 힘들다. 출범 초기, 전후기 제도로 펼쳐지기는 했지만 KBO가 제공하고 있는 연도별 팀 순위를 보면, 1982년 우승을 제외하면 두산은 꾸준히 중하위권이었다. 꾸준히 성적이 떨어지다가 1990년과 1991년에는 2년 연속 꼴찌를 한다.
가장 먼저, 서울에 자리를 잡았지만, 정치적인 압박과 명분에 밀려 3년간 대전을 갔다왔던 OB는 충청권의 배신자가 됐고, 군사정권의 배경 속에 원년부터 서울을 홈으로 쓴 MBC는 마치 서울의 적자인 양 유세를 부렸다. 하지만 둘 다 야구를 못했기에 '서울의 야구'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다. 성적 부진 속에 MBC는 적극적으로 구단 매각에 나섰고, 결국 LG가 이를 인수했다. 그런데 인수 첫 해였던 1990년, LG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서울의 야구 지형은 급격히 LG 쪽으로 기울었다. 잠실 맞대결에서 그들이 "OB 꼴찌~ OB 꼴찌~" 라고 비아냥 거리는 응원도 참 많이 들었다. LG는 1994년에도 우승을 차지하며, 우승 횟수에서도 OB를 추월했다. 특히 1994년에는 OB에서 이미 실패한 바 있던 이광한 감독의 '자율야구'가 LG에서 빛을 발했고, 유지현-김재현-서용빈 등 젊은 선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하며 엄청난 인기 몰이에도 성공한다. 젊은 층과 여성 팬들은 대부분 LG 팬이었고, 유명세 있는 연예인들도 LG를 응원한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MBC를 인수한 LG가 1990년부터 5년 간 2번의 우승을 차지하는 동안, OB가 LG보다 높은 순위에 있었던 적은 단 1번 밖에 없다. 야구도 더 잘했고, 인기도 더 많았고, OB가 못한 것을 해내는 팀이었다. 2000년대를 관통하는 LG의 암흑기가 워낙 길었던 탓에 두산이 LG보다 잘나가는 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1990년 MBC에서 팀을 인수한 이후로 서울 귀족은 LG의 몫이었고, 두산은 마당쇠 느낌이었다. 심지어 두산이 왕조를 건설하는 동안 유광잠바 입어보는 게 소원이었던 수준에 머물렀음에도 선수들의 복지 수준은 LG가 두산보다 훨씬 나았다.
야구도 못하고, 인기도 없으며, 내세울 것은 원년 우승 하나 뿐인 팀. 배신자이며 서울에 더부살이나 하는 팀. 가장 먼저 프로야구단을 창단했고, 1982년에 계획대로 프로야구가 출범할 수 있도록 희생을 감수하고, 비어있는 대전과 충청권을 3년간 연고지로 사용하는 양보를 했던 팀이라는 노력과 과거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게 OB였다. 그럼에도 이 팀을 응원하게 했던 매력은 무엇일까? 한 번 응원한 팀을 바꾸기 어렵다는 마음이 컸고, 야구를 더럽게 못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러면서도 갖고 있는 전력 이상의 투지를 발휘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OB의 슬로건은 '뚝심의 OB'였다. 야구를 썩 잘하지는 않았지만, 쉽게 지지 않았고, 믿기지 않는 역전승을 만들어내는 팀이었다.
1995년, 드디어 V2에 성공했다. 원년 우승을 이끌었던 불사조 박철순이 13년 만에 다시 마운드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만년 하위권에 머물던 팀 성적이 조금씩 반등했다. 2000년에는 한국시리즈에서 최강 현대 유니콘스에게 패했지만, 기대 이상의 선전으로 우승팀보다 더 주목을 받았다. 압도적인 전력의 현대가 우승하는 것은 기정 사실로 보였고, 1998년 이미 두산으로 팀명이 바뀐 옛 OB는 최강 현대에게 한국시리즈 1~3차전을 내리 패했다. 하지만 '질 때 지더라도 두산다운 끈기를 보여달라'는 팬의 편지가 두산 덕아웃에 걸렸고, 거짓말처럼 4~6차전을 잡아내며 승부를 7차전까지 끌고 갔다. 결국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고 3승 4패로 한국시리즈를 내줬지만, 두산의 분전은 많은 박수를 받았다. '우승으로 기억되는 승부는 많아도, 감동으로 기억되는 승부는 흔치 않다'는 캐치 프레이즈를 남겼다. 선수단은 경기 후 관중석 단상으로 올라와 "올해의 눈물을, 내년에는 기쁨의 눈물로 바꿔드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듬해, 1년 전 현대만큼이나 막강했던 삼성에게 시리즈를 뒤집으며 3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꾸준히 전력을 끌어올린 두산은 삼성 왕조와 SK 왕조 시절에 가장 강력한 도전자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2015년, 2016년, 2019년 정상에 올랐고 , 7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오르면서 '두산 왕조' 칭호와 함께 2010년대의 한국 프로야구를 상징하는 팀이 됐다. 그래서 지금도 '두산=강팀' 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하지만 OB 시절부터 두산을 응원했던 팬들에게 성적은 이전부터 팀이 갖고 있던 응집력과 끈기가 만들어 낸 결과일 뿐이다. 당연히 결과로 인정받는 프로의 세계지만, 워낙 지하에 묻혀있던 팀이기에, 오래된 팬들일수록 팀의 팀 컬러와 서사에 열광했다.
1998년, 시즌 막판 8연승으로 해태를 밀어내고 기적과 같은 순위 뒤집기를 만들며 1경기 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던 두산은 2019년에도 9경기차를 뒤집고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하는 기적을 연출했다. '뚝심의 OB'는 '감동의 베어스'로 다시 '허슬 두'로, 그리고 '미라클 두산'와 '가을의 기적'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왕조' 평가를 받기 전까지 한국시리즈를 3번(1982년, 1995년, 2001년) 제패했지만, 이중 1차전을 이긴 적은 한 번도 없다. 이 시기까지 한국시리즈 1차전을 이기지 못하고 우승을 차지한 것은 두산이 유일했다. 2001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두산은 6회말에 7득점을 올리며, 역대 한국시리즈 한 이닝 최다 득점 기록을 세웠다. 하루 뒤 4차전에서 2회초에 8점을 내주며 그 기록은 깨진다. 하지만 3회에 무려 12점을 득점하며, 다시 역사를 뒤집었다. 두산은 그런 팀이었다. 1982년, 순위에서는 앞섰지만 전력면에서 한 수 위라는 평가를 받았던 삼성과의 경기에서 김유동의 한국시리즈 최초의 만루홈런으로 우승을 거머쥐었던 두산은 20년 만에 정상에서 다시 만난 삼성과의 경기에서 이번에는 김동주가 만루홈런을 쏘아올렸다. 이때까지 한국시리즈에서 나온 만루홈런은 모두 두산의 것이었다.
객관적인 전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지도 못했고, 대기업을 모기업으로 두고 있지만 한 번도 '큰 손'다운 행보는 없었다. 오히려, 야구계에서 두산의 씀씀이는 초라했고, 상대 FA 대어를 잡기는 커녕, 우리 팀 FA도 못지키는 팀이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유망주를 발굴하는 '화수분'이었고, 때에 따라 스몰볼과 빅볼의 시즌을 확실히 다르게 가져가며 역사를 만들었다. 이런 과정에 탄탄한 수비와 기본기, 몸을 아끼지 않는 플레이, 그리고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기는 두산의 현재를 만든 팀 컬러였다. 다른 팀 선수들과 관계자들도 "객관적인 평가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두산의 힘이 놀랍다"라고 했는데, 이는 두산이 갖고 있던 가장 큰 강점이었고, 결과가 어떻든 그런 내용을 보여주는 두산의 모습은 팬들의 자부심이었다.
이승엽도 2022년 감독 취임사에서 분명히 밝혔다. "선수 시절 맞붙었던 두산은 탄탄한 기본과 디테일을 앞세워 상대를 강하게 압박했던 팀"이라고. 이를 지적하면서 '허슬두'와 '팬 퍼스트'를 강조했다. 그런데 지난 4월, 시즌 중 영입된 베테랑 고효준은 "두산은 악이 있던 팀이었다. 적으로 만났을 때 7,8,9회 투타 모두 강하고 무서웠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모습이 없어졌다"고 지적했다. 두산의 가장 큰 강점이자 팀 컬러이며 팬들의 자부심이었던 부분. 이승엽 본인이 취임사에서 강조했던 그 부분이 2년 만에 사라졌다는 걸 현장의 선수들이 직접 말하는 수준이다. 팬들이 일찍부터 불만을 제기했던 부분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사랑했던 모습이 사라져가는 팀이 되고 있는 것이었다. 악바리 근성이 사라지는 부분의 가장 큰 문제는 당연히 선수들에게 있다. 하지만 고유의 강점이 사라지는 것을 손쓰지 못했다면 감독 역시 자격은 없다.
2. 무경험 지도자
이승엽은 지도자 경험이 없었다. 선수 은퇴 후, 현장을 떠나 있었다. 그 어느 팀도, 심지어 이승엽이 전설로 각인되어 있는 삼성 조차 이승엽을 부르지 않았다. 지도자 경력이 전무한데 코치가 아닌 감독으로 바로 나선다는 것 자체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젊은 지도자들이 늘어나는 추세지만,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진출하며 적극적으로 지도자 연수를 받으면서 코칭의 기초부터 공부하고 새롭게 연구하며 성장한다. 그런데 이승엽은 이런 과정이 전혀 없었다. 현역 시절의 명성이 이력서의 전부였고, 이를 통해 떨어진 감독 낙하산과 같았다.
두산은 호화로운 스타 라인업으로 구성된 팀이 아니다. 코칭스태프가 '우쭈주'하면서 박수만 쳐주면 알아서 다 맞아갈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화수분 야구'의 본산일만큼 젊은 선수들이 팜에서 성장하며 점진적으로 결과를 만들었다. 등장부터 찬사를 받았던 선수는 대부분 외국인 선수였다. 두각을 나타낸 신인들도 타구단보다 우선 순위인 경우가 많지 않았다. 선수 선발을 잘하고, 선수 육성도 잘하는 팀이었다. 그래서 구단이 성장한 빅네임들을 지켜내지 못하고 다른 팀에 팔아먹기만 해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만큼 지도자의 역할과 역량이 중요한 팀이다. 경험이 많거나, 팀 내부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승엽은 둘 다 아니었다. 역대 두산 감독 중 초대 감독인 김영덕 감독을 제외하고, 두산에서 선수나 코치를 거치지 않았던 이는 김인식 감독과 이승엽 감독밖에 없다. 그러나 김영덕 감독과 김인식 감독은 이미 지도자로 수많은 경험을 쌓은 인물이었다. 반면 이승엽은 지도자 경험도 없고, 팀 두산에 대한 이해도 없었다.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가 지도자로 보여준 유일한 공식 행보는 TV 예능 <최강야구>의 감독이었다. 그런데 그 마저도 대단치 않았다. 고교생-대학생들을 상대로도 이승엽의 작전 야구는 그다지 성과를 보지 못했다. 심지어 <최강야구>조차 감독이 이승엽일 때와 김성근일 때 보여주는 색깔과 진지함이 완전히 다르다. 이승엽 감독 시절의 <최강야구>는 은퇴한 네임드들의 친목회 같았다. 야구에 대한 절실함과 진지함은 김성근 감독 시절에 두드러졌다. 단순히 지도자로서의 경험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지도자로서의 역량도 믿음직스럽지 못한 인물이었다.
3. '남의 팀' 국민타자의 융숭한 대접
장점은 현역시절의 압도적인 화려함인데, 그조차 '두산 팬'의 입장에서는 크게 반갑지 않다. 프로야구에 외국인 선수 제도가 도입됐던 1998년, 두산은 에드가 케세레스와 타이론 우즈를 영입했다. 특히 타이론 우즈는 이 시즌 홈런왕에 올랐다. 한국은 물론 메이저리그까지 범위를 넓혀도 매우 큰 경기장인 잠실을 홈으로 쓰는 두산에게 홈런왕 배출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게다가 두산은 김우열-윤동균 시대 이후, 리그 최고의 거포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한대화도 해태 이적 후 화려한 커리어를 완성했다. 1995년, 김상호가 서울 구단 최초의 홈런왕에 올랐지만, 엄청난 투고타저 시즌에 126경기에서 단 25개의 홈런으로 홈런왕에 올랐다하여, 그 가치가 폄훼되기도 했다.
그런데 1998년 우즈는 같은 126경기에서 42개의 홈런을 치며 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갈아치웠다. 우즈에게도 대단한 기록이지만, 두산 팬들에게도 상당히 값진 선물이었다. 두산은 이후 우즈를 중심으로 우동수(우즈-김동주-심정수) 트리오, 우재주(우즈-심재학-김동주) 트리오로 이어지는 클린업트리오가 100홈런 300타점에 도전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는 하위 타선의 안성기(안경현-홍성흔-홍원기) 트리오의 폭발까지 이어지며 2001년 두산의 우승을 이끈 힘이 되기도 했다.
우즈는 1998년 홈런 레이스에서 이승엽과 경쟁을 펼쳤다. 심지어 시즌 중반까지의 홈런 경쟁은 이승엽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어린 이승엽이 시즌 후반에 페이스가 떨어진 것과 달리 꾸준히 기세를 이어간 우즈는 42홈런 103타점으로 이승엽(38홈런 102타점)을 밀어냈다. 타율은 .306의 이승엽이 .305의 우즈를 근소하게 앞섰지만 아처피 리그 8-9위라 큰 의미는 없었다.
장종훈의 41홈런을 넘어설 페이스라고 찬사와 관심을 받던 이승엽은 우즈의 추격이 무섭게 펼쳐지자, 인터뷰에서 대뜸 "홈런왕만큼은 반드시 한국 선수가 받아야 한다"는 궤변을 발설한다. 후에 홈런 기록을 새롭게 쓰며 KBO의 역사이자 대한민국 국민타자로 거듭난 이승엽이지만, 기본적인 선수 마인드가 그렇게 모범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다. 선수 말년에도 자기 사인의 희소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며, 사인을 잘 해주지 않는다고 방송에서 당당히 말할 정도면, 프로로서의 의식이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해외 진출과정이나 사생활도 모범적이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승엽이 선수로서 대단한 건 맞지만, 내게 그 시절 최고의 슬러거를 묻는다면 타이론 우즈다. 우즈는 6년간 두산의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두산은 그런 이승엽을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계약 기간 3년에 총액 18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대접을 했다. 돈 없어서 FA 선수도 못잡는 구단이 경험이 일천한 감독의 이름값에 막대한 비용을 태웠다. 예상대로 결과는 투자 실패였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프로야구 선수들의 거품 몸값은 분명 문제다. 농구와 배구에서 선수들의 몸값이 너무 높다는 비난이 있는데, 국내 스포츠에서 프로야구가 차지하는 비중과 인지도를 고려해도 가장 지나친 선수 몸값은 프로야구에서 형성된다.
두산은 선수 시장에서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감독의 이름값에 기대어 '눈 가리고 아웅'했다는 인식을 지우기 힘들다. 감독 몸값이 아무리 역대급이어도, 선수를 따라갈 수는 없다. 이승엽에게 역대급 계약을 던지며 '돈 없는 무능한 구단'의 이미지에 물타기를 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이 있기에 원년 OB팬으로서 감독 이승엽이 반가울 리 없다. 당연히 그에 대한 평가는 인색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관대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이어졌다. 김택연을 비롯한 젊은 선수들의 혹사 논란에 자신이 직접 내뱉은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고, 시즌을 마친 후 자신에게 쏟아지는 야유도 이해하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이 이승엽 야구에는 그동안 두산 팬들이 열광했던 자부심이 없었다. 그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팀에 없는 것이 맞다. 본인이 직접 말했던 '퍼스트'인 팬들이 원하는 최고의 가치와 다른 길을 걸었으니, 팀과도 다른 길을 걷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후 어떤 기회가 주어질지 모르겠지만, 충분한 공부와 연구를 통해 현역 시절에 본인이 쌓았던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지도자로 거듭났으면 한다. 그래야 두산에서의 시간이 낭비가 아니라, 최소한 감독 연수의 가치는 가질 수 있을테니까... 왠지 시기도 모호한게, '불꽃야구'의 대항마로 JTBC가 내세운 '최강야구'에 오주원과 함께 하려고 물러난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안 보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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