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써야지...' 라는 생각을 계속 했는데,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고 지나서 오늘까지 왔다.
한동안 글을 쓰지 않은 게 한참이라, 특별히 무언가를 남기지는 않았지만, 시즌 전의 예측으로 ①우승은 BNK, ②PO 4강은 BNK, KB, 삼성생명, 우리은행이었다. 이렇게 놓고 보니 개막 이전에 모든 예상을 다 맞춘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세부적으로 보면 아니다. 일단, BNK의 통합 우승을 예상했다. 정규리그에서 우승을 놓칠 줄 몰랐다. 그리고 정규리그 4강 순위도 1위 BNK - 2위 삼성생명 - 3위 우리은행 - 4위 KB로 생각했다. 신한은행과 하나은행의 플레이오프 탈락도 맞았지만, 사실 최하위는 신한은행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니 많이 빗나간 예상이었다. 우승-4강 PO팀만 놓고보면 적중률 100%인데, 막상 리그 순위만 놓고 보면 6자리 중에 1개 맞았다. 전체적인 리그 판도는 BNK와 삼성생명의 2강 싸움, 거기서 조금 떨어져서 우리은행이 3위를 안정적으로 구가하고, KB와 하나은행이 4위 경쟁을 하다가 KB가 4위 - 하나은행이 5위, 그리고 신한은행이 최하위에 머물 거라고 생각했었다.
구분 | 예상 | 결과 |
우승 | BNK | BNK |
정규리그 순위 | BNK 삼성생명 우리은행 KB 하나은행 신한은행 |
우리은행 BNK 삼성생명 KB 신한은행 하나은행 |
1. BNK (정규리그 19승 11패 2위 / 챔프전 우승)
2강 혹은 1강의 자리를 갖출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절대 1강이 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가장 앞서는 리그 운영을 보여줄 것이라고 예상했기에 정규리그만 보면 다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진안이 FA 자격을 얻어 팀을 떠났고, 한엄지도 보상 선수로 내줬지만, 2024년의 FA 및 이적 싸움에서 BNK는 분명 승자였다. 전력 보강이 충실히 이루어졌다. 상당한 가능성을 인정받았던 BNK에게 '양날의 검'은 오히려 안혜지-이소희-진안이 중심이 되는 체제였다고 생각한다. 만년 하위권이었던 팀의 '희망'이자 '미래'였으며, 이제는 중추에 자리잡은 트로이카지만, 이들이 최상위권 싸움을 펼치는 시너지 효과를 만들 수 있을지 여부는 항상 의문이었다.
박정은 BNK 감독은 부임 당시 "팀 전력의 2/3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기존 선수들이 갖고 있는 기량 자체의 문제보다, 고착화 된 팀 분위기에 관한 지적이었다. 단순히 말하면 '패배 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불편한 분위기는 KDB생명 시절부터 이 팀에 고질병처럼 잔존했다. '팀 컬러'와는 다른 이야기다. 그보다 더 심연에 있고, 유무형의 효과를 발휘하며, 변화를 주기 어려운 부분이다. 박정은 감독은 이를 타파하기 위해 첫 시즌부터 적극적으로 선수단 구성에 변화를 줬다. 팀 분위기에 직접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는 베테랑부터 영입했다. 김한별과 강아정이었다. 성공 여부를 떠나 변화 없던 수조에 큰 요동이 생기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게 사실이다. KDB생명에서 연맹 위탁 운영팀(OK저축은행)을 거쳐 BNK로 창단하는 과정에서 이 팀은 젊은 팀으로 거듭났다. 기존의 베테랑들이 자의든 타의든 팀을 떠나게 됐다. 사실 이전의 과정에서 기존의 베테랑들이 팀의 반등을 이끌지 못한 것도 사실이며, 고질적으로 좋지 않은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이유가 됐던 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젊은 팀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분위기가 형성된 것도 아니었다. 기존의 분위기는 여전했다. 팀 스타일과 농구 방식의 변화는 있었지만, 잔존하는 분위기는 그대로였고, 나이만 젊어졌다. 박정은 감독은 이를 바꾸기 위해 부임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선수단 구성에 변화를 줬고, 부임 첫 해 플레이오프 진출 - 이듬해 챔프전 진출로 성과를 얻었다. 3년차였던 2023-24시즌에 6승 24패의 성적표와 더불어 다시 최하위로 밀려났지만, 2012-13시즌부터 10년간 플레이오프에 나서지 못했던 팀을 두 번이나 봄 농구로 이끈 감독에게는 당연히 기회가 주어져야 했다.
그리고 박정은 감독의 4년차 시즌. 대대적인 변화가 진행됐다. FA 대어였던 우리은행의 박혜진과 신한은행의 김소니아를 잡았다. 우리은행 왕조의 주역이었던 두 명이 한꺼번에 BNK의 유니폼을 입게 됐다. 진안을 하나은행에 내주면서 불안하게 시작한 FA 시장이었지만, 이들의 영입으로 한 번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많은 기대를 모았던 한엄지도 우리은행에 보내야했다. 하지만, 신한은행으로부터 변소정과 심수현도 받아왔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BNK 선수 중 2024-25시즌에 최소규정게임인 20경기 이상을 출전한 선수는 총 8명. 이 중 5명(김소니아, 박혜진, 이이지마 사키, 심수현, 변소정)이 새롭게 팀에 영입된 선수들이었다. 박정은 감독이 부임했던 2021년 3월 당시 BNK 소속 선수들은 총 15명. 4년이 지난 현재, 남아있는 선수는 안혜지와 이소희 둘 뿐이다. '선수단의 67%를 바꿔야 한다'는 무모해보였던 계획을 4년 만에 87%교체라는 초강수로 실행했고, 창단 첫 우승으로 결과를 얻었다.
급격한 변화가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 기대 효과보다 부작용이 큰 경우가 많다. 하지만 BNK는 박정은 감독 부임 후 4년 동안 경기력에 확실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핵심 베테랑(김한별, 강아정, 박혜진, 김소니아)을 영입하면서 꾸준히 선수단의 구심점을 마련하는 데 집중했다. 지난 3년간 김한별이 그 핵심이었다면, 이번에는 박혜진이었다.
2024-25시즌의 변화는 확실한 방향이 있었다. 코칭스태프가 원하는 농구를 코트에서 그대로 구현할 수 있는 선수들을 데려왔다. 김한별의 은퇴 후, BNK의 무게 중심은 다시 '안혜지-이소희-진안'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스피드와 활동량, 피지컬의 장점 등 매력적인 부분이 많은 선수들이지만 감독이 원하는 바를 코트에서 '똑똑하게' 만들어내는 능력은 부족하다. 승부처에서 스스로 결과를 만들어내는 부분도 아직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개인 능력으로 이들의 약점을 받쳐주고 끌어줬던 김한별이 없는 상황이기에 상당한 혼란을 피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BNK는 박혜진과 김소니아를 수혈했다. 김소니아는 김한별이 했던 해결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선수다. 단기적인 퍼포먼스에서 김한별만큼의 파괴력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시즌 전체를 놓고 보면 고질적인 부상을 안고 있던 김한별보다 안정감이 있고, 활동량에서도 BNK의 젊은 선수들과 함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선수다. 직접 부딪치면서 선수들을 끌어줄 수 있다. 박혜진은 설명이 필요 없는 선수. WKBL 현역 중 최다 우승과 최다 MVP 수상 기록을 갖고 있다. 위성우 감독 부임 이후, 우리은행이 이룬 찬란한 우승의 역사에 단 한 번도 빠진 적 없는 유일한 선수가 박혜진이다. WKBL 역대 최다승 기록을 갖고 있는 '위성우 감독의 페르소나'라 할 수 있는 박혜진의 영입은 경주마처럼 미친듯이 뛰어다니면서도 뜻밖의 충격에 위기 관리가 되지 않던 선수들을 코트에서 정돈하고 이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존재가 등장했음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BNK라는 팀이 가져보지 못했던 코트에서의 가장 강력한 리더가 등장한 것이다.
여기에 BNK는 아시아쿼터로 베테랑인 이이지마 사키를 추가했다. 1992년 생으로 일본 W리그에서도 10년의 경력을 갖고 있던 검증된 베테랑이다. BNK는 진안과 한엄지를 FA 시장에서 잃었지만, 남아있던 안혜지와 이소희는 물론, 팀의 기대주인 김정은, 김민아, 박성진, 새롭게 영입한 변소정과 심수현 등 손발 역할을 할 자원들은 충분했다. 이들의 선봉에 나설 김소니아에 머리가 될 수 있는 박혜진, 그리고 이이지마 사키까지 합류하며 사실상 최고의 전력을 갖췄다. 백업 자원이 충분치 않고, 주전 라인업을 소화할 빅맨이 없다는 점은 약점이었지만, 이를 파고들 수 있는 상대가 거의 없는 게 WKBL의 현실이다.
시즌은 이러한 기대에 어울리게 진행됐다. 하지만 부침도 있었다. 선수단 구성이 대대적으로 바뀐 상황에서 톱니바퀴처럼 유기적인 흐름이 바로 펼쳐지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박혜진의 몸도 정상은 아니었다.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조금 더 달아나면서 1위 굳히기가 가능할 것으로 보였지만, 박혜진과 이소희가 동반으로 장기 결장하면서 위기가 닥친다. 젊은 선수들이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치며 끈질기게 버텼지만, 결국 마지막 라운드의 순위 싸움에서 무너졌다. 우리은행에게 정규리그 1위를 내주고,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박혜진과 이소희의 동반 부상 공백이 1달이나 이어진 것이 치명타였다. 이 변수가 아니었다면, BNK의 통합 우승은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스포츠에서 가정은 의미가 없다. 어쨌든 정규리그 우승이 좌절되는 상황에서도 BNK는 박혜진과 이소희의 완전한 회복을 위해 인내하고 기다렸다. 삼성생명과의 플레이오프가 5차전까지 이어지며 어려움이 있었지만, 정규리그 휴식으로 컨디션을 어느 정도 끌어올린 이소희가 김소니아에 이어 팀의 공격 2옵션 역할을 수행했다. 박혜진도 결정적인 순간에 역할을 해내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줬다. 주득점원이었던 김소니아가 고전했던 챔프전에서 공격적인 역량도 과시한 이이지마 사키는 시즌 내내 이타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충분히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설 수 있지만, 조명 받는 역할을 양보하고 묵묵히 궂은일을 하는 것 같았다. 해줘야 할 선수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는 여지 없이 능력을 보여줬다.
기존 선수들 중에는 안혜지의 성장이 인상적이었다. 박혜진으로 인해 불안하던 부분이 많이 해소된 느낌이다. 그리고 큰 경기에서 약점이었던 외곽의 문제를 지워버렸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이번 시즌 안혜지의 3점슛 성공률은 27.3%. 높은 성공률은 아니지만, 통산 성공률이 25% 수준이었음을 고려하면 좋았던 시즌이었다. 또한 프로 데뷔 가장 많은 3점슛을 시도하고, 가장 많이 성공했다. 상대 수비의 새깅으로 외곽에서 철저히 버리면 되는 선수라는 약점을 어느 정도 상쇄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와 챔프전에서는 위력을 더했다. 3점슛 성공률이 삼성생명과의 플레이오프 5경기에서는 32.1%, 우리은행과의 챔프전에서는 36.8%였다. 안혜지의 외곽이 이렇게 들어가면 상대는 믿을 수 있던 수비 옵션 하나를 잃게 된다. 안혜지로서는 데뷔 후 꾸준하게 존재했던 외곽슛의 약점이 지워질 수 있도록 이 흐름을 다음 시즌에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2. 우리은행 (정규리그 21승 9패 1위 / 챔프전 준우승)
'탱킹.' NBA는 물론 KBL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단어다. 어느 정도 성적을 낸 팀이 숨고르기를 하는 시즌이다. 보통은 다음 시즌 초특급 신인 영입을 위한 드래프트 우선권을 얻기 위해 순위를 떨어뜨려, 고의적으로 쉬어가는 시즌을 만드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WKBL에서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당장 리그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초득급 대어'라 할 수 있는 신인이 10년에 한 명 나오면 다행인 상황이고, 한 번 팀 분위기가 무너지면 회복하기가 쉽지 않다.
"여자팀은 남자팀이랑 다르다. 한 번 주저 앉으면 와르르 미끌어진다. 브레이크가 없다. 바닥을 찍을 때까지 반등하기가 어렵다. 막상 바닥까지 내려가도 올라올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2012-13시즌, 부임과 동시에 '꼴찌' 우리은행을 통합 우승으로 이끌었던 위성우 감독은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통합 6연패를 마친 후, 꾸준히 우리은행과 정상전쟁을 펼치던 신한은행에 대해서도 "신한은행이나 되니까 흐름이 꺾였는데도 버틸 수 있는 것"이라며, "지금의 우리는 한 번 무너지면, 한도 끝도 없이 주저 앉을 것"이라고 말했다. 통합 우승을 수년째 이어가던 때에도 "언젠가는 내려갈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때에 한없이 추락하는게 아니라 버티고 견뎌서 다시 도전할 수 있는 팀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통합 6연패를 달성했던 WKBL의 가장 화려했던 '부자' 신한은행은 이후 3시즌 연속으로 정규리그 2위를 차지했고, 처음 두 시즌은 챔프전에 올랐다. 왕좌에서 내려온 후에도 3년 간은 넘버원 컨텐더의 위상을 유지했다. 하지만 2015-16시즌, 5위로 밀려나며 2005겨울리그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레알 신한은행'의 역사가 완벽하게 소멸하기 시작한다. 신한은행은 2013-14시즌 이후 11년째 챔프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왕조의 시대를 마감한 후 3년을 버텼지만, 이후로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은행은 달랐다. '정상에서 내려와도 추락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는 팀'이 됐다. 2012-13시즌부터 통합 6연패를 달성한 우리은행은 2018-19시즌, KB에게 왕좌를 내줬다. 하지만 정상에서 물러난 이후 7년째, 정규리그에서 2위 아래로 떨어진 적은 없다. 통합 우승도 차지했고, 챔프전에서도 두 번 더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2024-25시즌은 상당한 위기였다. 위성우 감독의 고민이 클 수 밖에 없는 시즌이었다. 어쩌면 그의 13년 감독 역사에 가장 큰 시련이었을지도 모른다.
부임 후 위성우 감독의 농구에는 확실한 축이 있었다. 우선은 높이 싸움의 우위다. 부임 첫 해, 위성우 감독은 양지희와 배혜윤을 데리고 있었다. 이듬해 배혜윤을 삼성생명으로 보내야 했지만, 리그 최고 센터로 키워낸 양지희가 국내 선수들과의 높이 싸움에서 항상 우위에 있었다. 빅맨 사샤 굿렛을 기량 이상으로 잘 활용했으며, 나탈리 어천와도 효과적으로 이끌었다. 후에 WNBA MVP까지 성장한 존쿠엘 존스를 데리고 있을 때는 33승 2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리그를 지배했다. 양지희의 은퇴와 박지수(KB)의 등장으로 판도 변화가 생긴 이후에도 위성우 감독은 크리스탈 토마스, 르산대 그레이 등 외국인 선수를 센터로 선발하며 높이에 포커스를 맞췄다. 하지만 외국인 빅맨의 카드는 기대에 못미쳤고, WKBL은 국내 선수들로만 경기를 치르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과거 '양궁 농구'를 앞세워 우리은행 왕조에 맞섰던 KB가 박지수를 앞세워 리그 최고의 높이를 구축했고, 이제는 우리은행이 '높이 vs 높이'가 아닌 변화를 선택할 시기가 왔다. 위 감독은 센터 없는 농구로의 전환을 시도했고, 외국인 선수가 없어진 WKBL에서 장신 가드와 포워드들을 앞세워 우리은행의 경쟁력을 만들었다.
위성우 감독 농구에 항상 존재했던 또 하나의 요소는 코트에서 경기를 이끌어 주는 세 개의 중심이었다. 2012-13시즌의 우리은행은 위성우 감독의 색깔이 입혀지는 과정이었다. 확실한 구심점이 없었다. 위성우 감독도 "에이스가 없는 팀"이라고 자평하거나, "티나 탐슨이 에이스"라며 국내 선수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하지만 이 과정을 거치며 우리은행은 왕조를 이끈 박혜진-임영희-양지희의 트라이앵글이 완성됐다. 이승아까지 계속 성장했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확실한 세 개의 축이 생기면서 우리은행은 이른 바, '슈퍼 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강력한 원투펀치보다 높은 안정감을 갖추고 있어, 어느 한 쪽에 균열이 와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팀이 됐다. 양지희가 은퇴한 후에는 김정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임영희의 은퇴 시점에는 박지현이 등장했다. 김정은의 이적 때는 김단비가 합류했다. 우리은행은 굳건한 3개의 축이 중심을 잡았고, 위성우 감독이 이끄는 슈퍼 팀의 위상을 놓치 않았다. 박지수와 강이슬을 앞세운 KB에게 객관적인 전력에서 열세를 보였지만, KB는 엄청난 원투펀치를 갖춘 팀이었고, 오히려 확실한 구심점을 포지션마다 구성하고 있던 슈퍼 팀에는 우리은행이 더 어울렸다.
하지만 2024년 FA시장에 이 모든 것이 깨졌다. 위성우 감독의 페르소나였던 박혜진이 BNK로 이적했다. 박지현은 해외 리그 도전을 선택했다. 오랫동안 팀의 주전 라인업에서 활약했던 최이샘, 그리고 선발 자원의 한 축으로 올라서던 나윤정도 팀을 떠났다. 김단비와 이명관을 제외한 모든 핵심 전력이 이탈했다. 심지어 남아 있던 선수 중 유승희는 부상으로 24-25시즌을 소화할 수 없는 상태. BNK가 자의에 의해 팀 전력의 대부분을 갈아 엎었다면, 우리은행은 타의에 의해 팀 전력을 새롭게 구성해야되는 시즌이 됐다. 위성우 감독 부임 이후 12년간 견고했던 세 개의 축은 커녕, 선발 스쿼드부터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24-25시즌, 우리은행에서 최소규정경기인 20경기 이상을 소화한 선수는 무려 10명. 이중 7명(한엄지, 스나가와 나츠키, 심성영, 김예진, 미야사카 모모나, 이민지, 박혜미)이 우리은행에서 첫 시즌을 보낸 선수들이다.
어떻게 구성해도 우리은행은 '김단비와 아이들'의 원맨팀이 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런데 이 구조에서도 우리은행은 경쟁력을 발휘한다. 위성우 감독 부임 후, 우리은행의 상징이 된 강력한 수비와 몸싸움, 적극적인 리바운드 가담이 여전했다. 우리은행의 높은 에너지레벨은 주력 선수들이 대거 이탈했음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게다가 에이스가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원맨팀이었지만, 그 원맨이 리그를 지배했다.
박지수가 없는 WKBL에서 김단비를 제어할 수 있는 선수는 없었다. 독보적이었다. 득점, 리바운드, 스틸, 블록, 공헌도에서 1위였고, 출전시간 2위, 자유투 성공률 4위, 어시스트 5위였다. 박지수에 이어 두번째로 8관왕과 함께 정규리그 MVP를 차지한 김단비의 위력은 압도적이었다. 시즌 내내 지치지 않고 팀을 이끌었다. 김단비를 도울 수 있는 확실한 조력자는 없었다. 하지만 돌아가면서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이명관이, 중간에는 한엄지가, 막판에는 신인 이민지가 기대 이상의 활약으로 김단비를 도왔다. 아시아 쿼터의 효과도 있었다. 이이지마 사키(BNK), 나가타 모에(KB), 타니무라 리카(신한은행) 처럼 확실하게 라인업의 한축이 된 선수는 없었지만 두 명이 번갈아가며 필요한 역할을 해냈다. 리그에서 2명의 아시아쿼터를 유기적으로 활용한 유일한 팀이 우리은행이었다. 우리은행의 스나가와 나츠키와 미야사카 모모나는 모두 29경기에 출전했다. 우리은행은 가용 가능한 자원에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는데 성공했다. 꾸준히 예상한 것 이상의 경쟁력을 이어갔고, 상위권에 머물렀다. 그리고 핵심 선수의 부상으로 흔들리던 BNK를 잡아채며 선두에 등극했고,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우리은행의 플레이오프 행은 충분히 예상했지만, 정규리그 1위는 정말 놀라운 결과였다. 솔직히 BNK와 삼성생명이 펼치는 최상위권 순위 싸움에는 명함을 내밀기 힘들 것으로 봤다. 다만, BNK와 삼성생명을 제외한 나머지 팀들의 전력에 안정감이 크게 떨어지는 만큼 ①김단비라는 확실한 에이스의 존재, ②12시즌 연속으로 2위 이상을 기록했던 '팀 우리은행'이 갖고 있는 저력, ③위성우 감독의 지도력을 바탕으로 상위권과 하위권 사이에서 안정적인 3위를 유지하리라 생각했다. 원맨팀의 한계로 그 이상은 어렵다고 봤다. 사실 우리은행이 갖춘 그 모든 결과는 김단비가 없으면 아무것도 만들어질 수 없었다. 김단비가 결장한 유일한 경기에서 '한 쿼터 무득점'이라는 치욕적인 결과를 얻은 것만 봐도 김단비의 유무가 우리은행에 얼마나 절대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모든 부담을 짊어지고도 김단비는 지독하게 강했다.
하지만 결국 플레이오프 이후에는 약점이 드러났다. 김단비는 2023-24시즌 플레이오프와 챔프전을 거치며 무쌍(無雙)의 위력을 과시했다. 삼성생명과의 플레이오프 4경기에서 평균 38분 14초를 뛰며 21.5점 7.8리바운드 4.0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챔프전 4경기에서도 박지수와 맞대결을 펼치며 평균 39분 21초동안 21.8점 6.5리바운드 6.5어시스트로 '미친 활약'을 보여줬다. 큰 경기에서 더 높은 집중력을 보여주면서 '김단비는 지치지 않는다'는 교훈을 던져줬다. 많은 선수들이 이탈한 2024-25시즌 정규리그에서도 김단비는 지치지 않았고, 정규리그에서 독보적인 MVP를 차지하며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런데 플레이오프와 챔프전에서는 달랐다. 이번 시즌에도 김단비의 포스트 시즌 성적은 더할나위 없다. KB와의 5경기에서 평균 37분 36초동안 17.2점 12.4리바운드 4.4어시스트를, BNK와의 챔프전 3경기에서는 평균 37분 40초동안 20.7점 12.0리바운드, 3.7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하지만 스탯에서 보이지 않는 괴리감이 있었다. 폭발적이었던 김단비의 몸놀림이 이전과 같지 않았다. 압도할 것으로 예상했던 KB와의 플레이오프를 5차전까지 끌고 갔다. 지난해 플레이오프와 챔프전, 그리고 24-25시즌의 정규리그와는 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정규리그 때,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던 이명관과 이민지가 꾸준하게 역할을 해주지 못했다. 정규리그 막판에 결장했던 한엄지가 복귀했지만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기에, 인사이드에서 김단비를 제대로 지원할 수 없었다. 지난 시즌의 우리은행에는 김단비가 미친듯이 날뛸 수 있었던 배경이 존재했다. 박혜진-박지현-최이샘이 공수에서 김단비를 도왔고, 김단비가 교체 없이 코트에서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었다. 하지만 정규리그를 잘 버텨줬던 우군들이 흔들리면서 이번에는 김단비에게 그런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김단비도 지쳤다. 심성영이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친정팀에게 비수를 꽂아, 플레이오프에서의 고비는 넘겼지만, 챔프전에서는 여력이 없었다. BNK의 약점인 포스트의 높이와 선수층의 약점을 공략하는 농구가 나오지 않았다. 박혜미가 분전했지만, 인사이드에서 확실한 우위를 가져가는 싸움을 할 수는 없었다. 해결사가 김단비 뿐이라는 것도 결정적인 상황에서 카드가 훨씬 다양했던 BNK에게 우리은행이 고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됐다. 김단비 역시 이기는 농구를 즐길 줄 아는 선수가 됐지만, 우리은행 시절, 김단비보다 그런 싸움의 경험을 훨씬 많이 했던 박혜진과 김소니아가 BNK에 도사리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 시즌 '올마이티(Almighty) 김단비'의 유일한 흠이었던 외곽슛의 약점도 플레이오프 이후에는 독이 됐다. 김단비의 이번 시즌 3점슛 성공률은 22.3%. 2009-10시즌에 이어 두번째로 저조하다. 프로 통산 30%에 수렴하는 3점슛 성공률을 기록 중이었는데, 이번 시즌에는 3점슛이 크게 흔들렸다. KB와의 플레이오프에서는 19개를 던져 단 2개 성공에 그쳤고, BNK와의 챔프전에서도 17개 중 4만 성공했다. 김단비는 절대적인 온볼 플레이어다. 볼을 갖고 경기를 한다. 박혜진-박지현이 있을 때는 다른 형태가 가능했지만, 2024-25시즌의 김단비는 사실상 '포인트 포워드' 역할을 했던 과거 신한은행 시절에 준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떻게보면 진화한 형태의 '단비은행 시즌2'가 이번 시즌의 우리은행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외곽이 듣지 않고, 패스를 통해 살려줄 수 있는 믿을 만한 2옵션이 없는 상황이라면, 아무리 위력적인 김단비라도 상대는 포커스를 좁혀서 확률을 높이는 수비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김단비도 지친다'는 당연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우리은행이 끝내 버텨내지 못했다.
3. 삼성생명 (17승 13패 3위)
'전통의 강호.' 삼성생명에게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폐가 있다. 삼성생명이 농구대잔치 시절 동방생명부터 이어지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의 팀'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과연 여기에 '강호'라는 말을 더할 수 있을까? 삼성생명은 플레이오프의 단골손님이고, 지난 2020-21시즌에는 '언더독의 반란'으로 기적같은 우승을 차지했다. 그런데, 이게 전부다. 이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 팀들도 많지만 6개 팀밖에 없는 WKBL에서 이정도 결과를 두고 '전통의 강팀'이라 하기는 민망하다. 13년째 2위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있는 우리은행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은행과 정상 전쟁의 파트너로 올라선 KB, WKBL 출범 후 최초의 통합 6연패를 달성했던 신한은행과 비교해 '강호'라는 말을 달기는 적합하지 않은 이력이다.
삼성생명이 마지막으로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한 것은 2004겨울리그이고, 마지막으로 정규리그 1위 싸움을 한 것은 2006여름리그다. 바우터스가 맹위를 떨치고, 박정은-변연하-이종애 등 현재 BNK의 코칭스태프들이 절정의 기량을 발휘했던 시기다. 이후 약 20년 동안 삼성생명은 WKBL 정규리그에서 1위 싸움을 펼쳐본 적이 없다. 물론 이후 19번의 리그에서 5번이나 2위에 올랐다. 하지만 1위를 위협했던 적은 없다. 일찌감치 선두 경쟁이 끝난 상황에서 차지한 2위였다. 삼성생명은 좋은 성적을 거뒀던 시즌에도 최강자, 혹은 1위 다툼을 하는 팀들을 올려보내고, 바로 그 아래에 위치한 시즌을 보냈다. 소위 '천상계의 싸움'은 포기하고, 그 아래의 '인간계'를 지배한, 호랑이 없는 동굴의 여우같은 모습으로 거의 20년을 보냈다. 그러다보니 이러한 흐름이 팀에 고착화된 느낌이다. 정규리그 막판, 대부분의 팀들이 치열한 경쟁을 펼치지만, 참 오랫동안 삼성생명은 이 시기에 다른 눈 높이와 더불어 '안락한 순위 싸움'을 이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런 삼성생명에게 2024-25시즌은 기회였다. 특히 정규리그가 그랬다. 삼성생명은 2024-25시즌, 가장 강력한 정규리그 우승 후보 중 하나였다고 본다. BNK와 함께 정상을 다툴 팀이었고, BNK를 가장 위협할 수 있는 팀이었다. 오랫동안 WKBL의 최강자를 놓고 다퉜던 우리은행과 KB의 전력이 한 번에 무너졌다. 두 최강팀이 무너진 가운데, BNK가 쏠쏠한 전력 보강에 성공했지만, 기존의 전력이 보존된 채로 경쟁력을 유지한 팀은 삼성생명이 유일했다.
게다가 삼성생명에는 확실한 강점이 있었다. 우선 선수층이 두텁다는 것. 2020-21시즌 4할대의 승률에도 불구하고, 챔프전 언더독의 반란으로 '뜻밖의 우승'을 차지했던 삼성생명은 챔프전 MVP였던 김한별을 BNK로 보냈다. '리빌딩이 아닌 리툴링'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리빌딩이다. 과정 여부를 떠나 다음 시즌, 3할대 승률로 플레이오프에도 탈락했기에, 리툴링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상처일 수 있다. 아무튼 삼성생명은 이런 과정을 통해 젊은 유망주들을 대거 영입할 수 있었다. 이전에도 윤예빈, 이주연, 신이슬 등 젊은 자원들을 확보하고 있었던 삼성생명은 이후, 강유림, 조수아, 이해란, 키아나 스미스를 품었다. 박지수(KB)나 김단비(우리은행), 박지현(아줄 마리노)과 같은 압도적인 자원은 없지만, 베테랑과 중견, 젊은 선수까지 준수한 선수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팀이다. 주장 배혜윤과 NCAA 파이널 4의 주전 가드였던 키아나는 내외곽 에이스 역할을 분담할 수 있는 선수들이고, 이해란의 성장도 꾸준했다. FA 자격을 획득한 신이슬이 이적했지만, 김아름을 보상 선수로 영입했고, 여기에 키아나는 리그에 대한 적응력을 더욱 높여갈 수 있는 시즌이기에 전력 상승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다.
또한 정상적인 포지션 밸런스를 갖춘 몇 안되는 팀이었다. 포지션의 개념이 큰 의미가 없어진 현대 농구지만, WKBL에서는 여전히 가드-포워드-센터가 맞춰가야 하는 역할과 이를 바탕으로 경기를 풀어가는 힘이 중요하다. 그런데 WKBL 전체에서 오랫동안 센터 품귀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확실한 빅맨을 보유하고 있는 팀이 없다. 2024-25시즌에는 박지수의 해외진출과 진안의 이적으로 확실한 센터를 갖춘 팀은 삼성생명과 하나은행 뿐이었다. 센터는 있지만 앞선 자원에 균열이 있던 하나은행과 달리 삼성생명은 가드와 포워드도 충분한 전력을 구성 중이었다. 게다가 박지수가 없는 WKBL에서 여전히 젊은 센터들은 배혜윤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박지수 등장 이후 리그 베스트5의 센터 자리는 박지수의 독보적인 영역이었고, 박지수가 부재 중일때는 배혜윤의 차지였다. 국가대표를 다녀온 진안(하나은행)과 양인영(하나은행)이 여전히 배혜윤에게 밀린다는 것이다. 확실한 포지션 밸런스와 충분한 가용 인원, 그리고 준수한 선수단과 에이스의 존재. 이는 장기 레이스인 정규리그에서 확실한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다.
하지만 삼성생명은 기대만큼의 시즌을 보여주지 못했다. 4연패로 시즌을 시작했다. 7연승을 달리며 반등하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선두 싸움을 오래 하지는 못했다. 물론 부상 변수가 있었다. 윤예빈은 제대로 회복되지 못했고, 이주연도 단 10경기 밖에 뛰지 못했다. 예전부터 명망 높은 STC를 갖추고 있음에도 선수 부상 관리 측면에서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못하고 있는 삼성생명으로서는 상당히 실망스러운 내용이다. 여기에 시즌 막판에는 키아나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순위 싸움에서 경쟁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좋은 전력을 구성하고 있지만, 한 포지션에 부상자가 집중됐던 점도 불운이었다. 아시아쿼터로 영입한 히라노 미츠키가 선발 순번에 비해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도 가드진의 부상 공백을 제대로 채우지 못한 이유가 됐다. 하지만 매번 시즌 막판의 순위 싸움에서 삼성생명이 보여줬던 '경기력의 한계'가 여전했다는 부분도 되짚어볼 부분이다.
삼성생명은 '도깨비 팀'이다. 정말 좋지 않은 상황에서 놀라운 승리를 거두기도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서 도저히 질 수 없는 경기를 엉망으로 잃기도 한다. 전력의 안정감과 분위기를 꾸준하게 끌고 가는 힘이 부족하다. 팀 자체의 기복이 수년째 이어지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안락한 순위 싸움'은 삼성생명이 시즌 막판만 되면 환절기처럼 반복적으로 겪는 모습이다. 현재 위치가 어디든 갑자기 경쟁력이 흔들리고, 기복있던 경기력은 안좋은 쪽으로 일관성을 갖는다. 그리고 상위팀보다 먼저 플레이오프 준비에 돌입하게 된다. 삼성생명 관계자는 "일부러 안배하는 것이 아니라, 매 경기 최선을 다하는데 결과적으로 그런 모습이 나온 것"이라고 하는데, 삼성생명에게는 이것이 매우 익숙해진 느낌이다. 선수들이 알아서 '시즌은 이 정도 했으니, 플레이오프나 대비하자'고 마음 먹거나 플레이를 놓아 버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과정이 반복되며 삼성생명 특유의 모습이 되어버린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정규리그의 흐름이 과거에는 그래도 결과를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단기전에서 뜻밖의 변수를 만들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열세인 팀이 단기전에서 승부를 뒤집기 위해서는 중요한 조건이 있다. 경기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버릴 수 있는 선수의 활약이다. 야구에서 '플레이오프에서는 미친 선수가 나와줘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I'm the crazy bitch around here!" 미드 <가십걸>에 나온 이 유명한 대사에 어울리는 선수가 필요하다. 삼성생명에는 그런 선수들이 있었다. 가장 마지막까지 '명가' 삼성생명의 자존심을 지켰던 이미선이 은퇴한 후에도, 김한별, 김보미, 박하나 등이 '이 구역의 미친 X'에 모자라지 않을 활약을 펼쳤다. 2020-21시즌에도 김한별과 김보미가 펼친 '무서운 언니'들의 호러쇼에 젊은 선수들이 공명하면서 '언더독의 반란'을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삼성생명에는 이런 선수들이 없다. 삼성생명 자체적으로도 '파이터가 없다'는 지적을 한다. 신이슬의 보상 선수로 김아름을 선택하고, 이른 순위에 미츠키를 선발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기전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줄 수 있는 '시공간의 주인'이 될 주력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 삼성생명의 확실한 주력이자 원투펀치가 될 키아나와 이해란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2023-24시즌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생명은 우리은행에게 1차전을 이기고도 이후 3경기를 내리 졌다. 폭주하는 김단비에게 완전히 압도당했다. 지더라도 같이 부딪치며 맞불을 놔야하는데 전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무기력했다. '설령 경기를 지더라도 곱게 물러날 수는 없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선수가 나타나면 코트의 공기가 달라진다. 심지어 그 선수가 주력급, 혹은 에이스라면 그 파급력은 더욱 어마어마하다. BNK의 박혜진, 김소니아, 우리은행의 김단비, KB의 박지수, 강이슬, 하나은행의 김정은은 그런 모습을 과거와 현재에 모두 보여주는 선수들이다. 삼성생명에게 모자란 결정적인 1인치는 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번 플레이오프에서는 최소한의 수확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BNK가 3경기 만에 끝낼 시리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 경기를 내주고도 삼성생명이 용인에서 반격에 나섰다. 2패 뒤 연승을 거두며 5차전까지 승부를 가져갔다. 여전히 부상으로 인한 정상 전력이 아니었다는 상황까지 고려하면, 조금은 삼성생명의 분위기와 투쟁심이 나아지고 있다는 기대를 걸어볼 수 있지 않을까?
4. KB스타즈 (12승 18패 4위)
KB의 4강 가능성을 말하면 대다수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이번시즌 최하위 후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팀 전력은 물론, 대한민국 국가대표 전력에도 절대지분을 차지하는 박지수의 공백은 어떻게도 채울 수가 없는 요소였다. FA 시장에서 나윤정을 영입했는데, 나윤정 역시 박지수가 있을 때 더 활용도를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전력 상승에 한계가 보였다. 객관적인 구성에서 어려움이 많아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미 KB는 2022-23시즌에 박지수의 부재가 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 바 있다.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KB는 박지수의 부재 속에 10승 20패, 5위로 시즌을 마쳤다. 공황장애로 시즌을 함께하지 못한 박지수는 12월 중순 복귀했지만 손가락 부상으로 5라운드 도중 시즌 아웃됐다. KB는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의 박지수가 뛴 9경기에서 6승을 거뒀다. 박지수가 없었던 21경기에서는 4승 17패. 해당 시즌 최하위였던 하나은행보다도 낮은 승률이었다. 박지수의 부재는 KB 전력이 심각하게 떨어지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이를 보완하거나 대체할 방법도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하지만 그때와 분명 다른 조건이 있었다. 2022-23시즌의 KB는 오매불망 박지수를 기다렸다. '어떻게든 버티면 박지수가 돌아온다', '박지수가 돌아오면 그때부터 시작이다'는 생각이 시즌 전체를 지배했다. 반면 2024-25시즌의 KB는 그냥 '박지수 없는 농구'를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박지수는 시즌 내내 없는 게 확정이다. 그러다가 돌아온 박지수가 시즌아웃되면서 스스로의 기대도 소멸됐다. '기댈 것이 없다'는 조건은 팀을 무너지게도 할 수 있지만, 반대로 다른 방법을 도모할 수 있는 이유도 된다. 박지수와 강력한 원투펀치를 이뤘던 강이슬이 자존심과 승부욕이 상당한 선수라는 점, 그리고 허예은이 꾸준한 성장세에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었고, 하나은행과 신한은행의 경쟁력도 그렇게 높아보이지 않았기에 역대 4위 팀 중 가장 낮은 승률을 기록하더라도 플레이오프에는 도전할 수 있으리라는 예상을 했다. 그리고 시즌 출발도 괜찮았다. 순위 싸움을 위해 반드시 잡아야 하는 하나은행과 신한은행을 연파했다. BNK와 삼성생명에게 패했지만, 우리은행을 이기면서 1라운드에 6할 승률을 올렸고, 다시 하나은행을 잡으며 초반 6경기 4승 2패를 거뒀다. 하지만 상승세는 여기까지였다. 이후 2번의 4연패를 당하면서 추락했다.
리바운드의 열세가 두드러졌고, 스몰 라인업의 농구가 확실한 색깔을 보여주지 못했다. 박지수의 공백과 김소담, 김민정의 부상 및 부진으로 높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던 KB는 "정확한 외곽슛과 빠른 농구로 맞서겠다"고 밝혔지만, 높이를 상쇄할 수 있는 변화가 가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4승을 거둔 후 KB의 승리는 드물었다. 4연패 뒤 1승, 4연패 뒤 1승, 3연패 뒤 1승... 성적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김완수 감독은 리바운드 경쟁력을 강조했지만, 리바운드 경쟁력이 갑자기 반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리바운드는 KB에게 오래된 숙제다. 박지수로 인해 이미지 세탁이 되었을 뿐, KB의 리바운드 고민은 상당히 오랫동안 이어졌던 팀 자체의 풀리지 않는 고민이었다. KB는 WKBL 초창기부터 대표적으로 '공주 농구'를 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적극적인 리바운드 싸움에 약점이 있었다. 거친 몸싸움과 투지넘치는 플레이가 돋보이는 팀은 아니었다. 서동철 감독 시기를 겪으면서는 아예 양궁 농구로 방향을 잡았고, 이후에는 박지수가 입단했다. 이 과정에서 리바운드에 대한 이야기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KB의 리바운드는 거의 박지수의 몫이었다. 박지수가 없는 상황에서 리바운드 경쟁력을 보여주는 선수는 없었다. 박지수가 있을 때도 리바운드를 하지 않던 선수들이 박지수가 없다고 갑자기 리바운드에 적극성을 갖는다는 건 판타지와 같은 이야기다. 그 약점은 여전하고, 한 시즌 만에, 혹은 시즌 중에 고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상황에서 강이슬의 희생이 돋보였다. 강이슬은 이번 시즌 7.4개의 리바운드로 KB에서 가장 많은 리바운드를 잡아냈다. 우리은행과의 플레이오프 5경기에서는 10.8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원래도 강이슬은 리바운드 참여도가 적지 않은 선수였다. 외곽슛의 장점과 수비의 약점으로 인해 적극성이 평가 절하되는 경우가 있는데, 강이슬은 슈터들 중에서 리바운드 기여도가 가장 높은 선수 중 하나다. 하지만 24-25시즌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박스 아웃과 리바운드에 가담했다. 자타 공인 리그 최고의 슈터인 강이슬의 이번시즌 3점슛 성공률은 28.7%. 자신의 통산 3점슛 성공률보다 10%가 떨어진다. 3점 슈터로 확실히 자리를 잡은 2014-15시즌 이후, 강이슬의 3점슛 성공률이 가장 부정확했던 시즌이다. 강이슬은 KB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리바운드에 가담했고, 몸싸움과 궂은일까지 담당했다. 또한 박지수가 없었지만, 허예은의 성장으로 강이슬이 외곽에서 볼을 잡는 시간도 그다지 크게 늘어나지는 않았다. 이러한 흐름에서 자신의 슛 감각과 야투 정확도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외곽슛이 장점이며 주득점원인 선수가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것보다는 팀의 약점을 보완하는 데에 치중했다. 이러한 강이슬의 헌신 속에 올스타 브레이크를 즈음해서는 신인 송윤하가 경쟁력을 보이면서 인사이드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갔고, 순위 싸움의 한계를 극복하기 시작했다. 시즌 초반의 분위기를 이어가지 못했던 나가타 모에가 정규리그 막판에 집중력을 끌어올리며 활약한 것도 플레이오프 경쟁에 큰 힘이 됐다. 모에는 클러치 상황에서 활약하면서 결정적인 승리를 팀에 안겼다. KB는 모에를 아시아쿼터 전체 5순위로 선발했는데, 이 선택이 KB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매우 큰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2년 연속 10+ 득점으로 시즌을 마친 허예은은 평균 7.0개의 어시스트로 이 부문 1위에 올랐다.
KB는 플레이오프 싸움에서도 경쟁자였던 신한은행보다 조금 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신한은행과 동률의 성적이었지만 플레이오프 티켓은 KB의 몫이었다. 두 팀은 맞대결도 3승 3패로 팽팽했다. 결국 맞대결 득실까지 따져, 단 1점 차이로 KB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KB는 신한은행과 맞대결에서 3승 2패로 앞서고 있어, 마지막 6라운드에서 이기면 확실하게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2쿼터에 역전을 당한 후 끌려갔고, 경기를 뒤집기 어렵게 됐다. 5라운드까지 맞대결 득실차에서 7점을 앞서고 있던 KB는 6점차로 뒤지고 있던 6라운드 맞대결 막판에 지공을 선택하면서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지고 있는 팀이 템포를 늦추는 기이한 모습이 펼쳐졌다. 승부를 뒤집을 수 없다고 판단하자, 득실차를 지키기 위한 선택을 한 것이다. 반면 신한은행은 무리를 해서라도 점수차를 더 벌리기 위한 플레이를 펼치지 않았다. 맞대결 득실차 1점은 결국 플레이오프 진출과 탈락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가 됐다.
박지수의 공백은 어떻게도 극복할 수 없는 큰 숙제였지만, 잘 뽑은 아시아쿼터 선수, 에이스의 희생, 루키의 성장이 어우러졌고, 마지막 순위 싸움에서의 냉정한 상황 판단이 더해지며 KB는 플레이오프에 올랐다. 최하위 후보 0순위라는 시즌 전의 혹평은 오히려 훈장이 됐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좋은 경기를 펼쳤다. 시즌 맞대결 1승 5패의 절대 열세였던 우리은행과의 플레이오프에서는 5차전까지 가는 치열한 승부가 이어졌다. 상대 에이스 김단비에 대한 적절한 대처가 쉽지 않아 상당한 열세가 예상됐지만, 전통적으로 몸싸움과 리바운드에 강점이 있는 우리은행을 상대로 오히려 리바운드에서 우위를 보였고, 끝까지 상대를 물고 늘어지는 투지를 보였다. 이채은, 이윤미 등 젊은 선수들이 가능성을 보여준 점도 수확이었다. 시리즈 내내 상대 우위를 점했던 3점슛 정확도가 마지막 5차전에서 흔들리며 대어 사냥에는 실패했지만, 전체적으로 고무적인 시즌이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부상으로 인해 주장 염윤아가 13경기를 결장했고, 목 부상 이후 슬럼프에 빠진 김민정의 부진은 이번 시즌에도 계속됐다. 송윤하가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지만, 4번 포지션의 안정감을 도모할 수 있는 선수들의 활약이 아쉬웠다. 2023-24시즌 1순위 신인으로 기대했던 고현지도 만족스럽지는 못했고, 베테랑 빅맨 김소담도 시간이 흐를수록 존재감이 사라졌다. FA로 영입한 나윤정도 어깨를 다치며 시즌 아웃됐다. 새 시즌, 박지수의 복귀 하나로 다시 절대 1강의 자리를 되찾을 KB는 아쉬웠던 부분들의 보완 여부에 따라 얼마나 2025-26시즌을 완벽하게 압도할 수 있을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5. 신한은행 (12승 18패 5위)
그래도 플레이오프에는 올라갈 것이라는 기대 속에, 4위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던 팀.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최하위 가능성이 더 농후하다고 봤는데, 4위와 6위 사이의 5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KB와 동률을 이뤘지만, 맞대결 득실차에서 1점이 모자라 5위에 머물렀기에 아쉬움이 상당할 것이다. 구나단 감독이 뇌종양으로 수술대에 올라 이시준 코치의 대행 체제로 시즌을 치렀고, 시즌 막판 중요한 대결에서 갑작스런 장염으로 주축 선수들이 결장하는 등의 악재도 있었다.
신한은행의 경쟁력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팀에 에이스가 없었기 때문이다. '슈퍼 에이스 1명이 있는 팀과 준수한 자원이 여럿 있는 팀 중 어디가 더 나은가'라는 질문은 항상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신한은행은 에이스의 히어로볼에 익숙한 팀이다. '레알 신한은행' 시절이 막을 내린지는 이미 한참이지만, 이후로도 신한은행에는 항상 확실한 해결사가 존재했다. '단비은행' 소리를 들으며 김단비가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고, 김단비의 이적 후에는 김소니아가 에이스로 활약했다. 하지만 김소니아도 FA 자격을 얻어 BNK로 떠나면서 신한은행의 해결사 자리가 요원해졌다. FA 시장에서 최이샘과 신이슬을 영입했고, WKBL 최고 인기 스타 중 한 명인 신지현을 데려왔지만, 김단비-김소니아가 맡았던 강력한 에이스의 역할을 단독으로 이어받기는 부족했다. WKBL에서는 확실한 에이스 한 명이 갖고 오는 파급력이 상당하다. 특히 오랫동안 확실한 주득점원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경기를 했던 팀이 그런 해결사가 없는 구성에서의 농구로 전환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에이스 없는 농구'가 되지 않도록, 보완이나 변화의 주축이 되어야 할 영입 선수들이 모두 좋지 않았던 것도 신한은행에게는 뼈아팠다. 하나은행의 프랜차이즈였던 신지현은 FA 보호 선수 명단에서 제외되며 보상 선수로 팀을 옮기게 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5시즌 만에 한 자릿 수 득점으로 회귀했고, 3점슛 성공률은 데뷔 후 처음으로 30%를 넘지 못했다. 하나은행 시절보다 플레이 자체의 탄력이 떨어졌고, 의미 없는 턴오버가 많았다. 또한 자신의 자유투 실패나 수비 실수가 역전패로 직결되는 불운까지 겹치며 힘든 시즌을 보냈다. 삼성생명에서 출전 시간을 늘려가며 자리를 구축하던 신이슬은 평균 18분대로 출전 시간이 줄어들었고, FA 이적생 다운 모습은 물론, 그 만큼의 기회도 받지 못했다. 우리은행에서 수많은 우승 경험과 더불어 큰 경기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보여줬던 최이샘은 부상으로 13경기를 결장했고, 평균 8.3 득점에 그쳤다. 슈퍼팀에서의 신스틸러이자 만점조연에서 주연으로 거듭나는 데에는 실패한 시즌이다. FA 시장에서 가드가 2명이나 영입됐는데, 시즌 내내 확실한 1번을 찾지 못한 점도 아쉽다. 강계리, 고나연, 김지영, 신이슬, 신지현, 허유정 등 가드 자원이 넘쳐났지만, 최고참인 이경은 만큼의 영향력을 보여준 선수가 없었다.
또한 신한은행은 선수단 재편 과정에서 심수현, 변소정(이상 BNK), 이다연(사천시청)을 내보냈다. 불과 1년 전, 신한은행 코칭스태프가 "우리팀의 미래"라고 공언했던 선수들이다. 변소정은 2023-24시즌, 개막전에서 단 12분만 뛰고 큰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됐다. 시즌 준비과정에서부터 변소정을 주목했던 신한은행 코칭스태프들은 신한은행의 성적이 부침을 겪을 때마다 프로 3년차인 변소정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그만큼 변소정이 있었으면 상황이 달랐을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이다연도 마찬가지. 직전 시즌 29경기에서 평균 18분 가까이를 소화하며 역할을 늘려갔고, 36.8%의 성공률로 리그 3점슛 성공률 부문 3위에도 올랐다. 심수현은 변소정이나 이다연 만큼 경기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신한은행 코칭스태프는 "시야를 비롯해 순수 가드 능력 자체는 우리 팀에서 최고"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장기적인 계획을 볼 때 반드시 지켜야 했던 선수들인데, 신한은행은 이들 모두를 내보냈다. 미래의 청사진 자체를 새롭게 디자인 했을 수도 있지만 장단기적 플랜 모두가 상당히 변화를 겪었고, 이로 인해 전체적인 안정감을 유지하기 힘들었던 시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전체 1순위로 선발한 신인 홍유순은 29경기에서 평균 26분 이상을 뛰며 8.1점 5.7리바운드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또한 3라운드에는 4경기 연속 더블-더블을 작성하며 박지수도 달성하지 못했던 루키 최초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박지수의 루키 시즌에는 WKBL에 외국인 선수 제도가 있었다는 점에서 차이는 존재한다.) 아시아쿼터로 선발한 타니무라 리카도 정통 센터로서 좋은 활약을 펼쳤다. 25경기에서 평균 28분 49초를 뛰며 12.6점 7.0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신한은행은 4-5번 포지션인 홍유순과 리카가 평균 20점 13리바운드를 책임지며 안정감 있는 인사이드를 구성할 수 있었는데, 앞선에서 이들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운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리를 잡은 빅맨에게 볼 투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점은 아쉬웠다.
이러한 부분들이 모두 종합되어 나타난 결과가 신한은행의 경기력이었다.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린 선수는 리카 한 명이었다. 지난 시즌 10+ 득점을 올린 선수가 단 한 명인 팀은 우리은행과 신한은행 밖에 없다. 다민 우리은행은 평균 21.1점으로 독보적인 득점 1위를 차지한 김단비가 득점 뿐 아니라 여러 영역에서 압도적인 에이스의 역할을 보여준 반면, 신한은행의 최다 득점자였던 리카의 활약은 12.6득점 이상의 파괴력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전체적으로 방향성을 찾지 못한 가운데, 공격이나 수비, 전체적인 경기력 등 다방면에서 어중간한 모습이었고, 승부처 집중력은 특히 불안했다. 박빙의 상황에서 당연히 해결사를 중심으로 경기를 풀어야 했지만, 이 상황에서는 리카도 확률 높은 옵션이 되지는 못했다. 시즌을 통틀어 5점 내 승부에서 신한은행이 이긴 경기는 단 3경기 뿐이었다. 확실한 에이스는 없어도, 어느 정도의 경험을 갖춘 중견 선수들은 꽤 있는 팀이지만, 이들 역시 승부처에서 집중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결국 새 시즌도 신한은행은 집단 공격 체제보다는 전체적인 공격을 이끌어 줄 수 있는 확실한 1옵션을 찾는 것이 숙제가 될 수 있다. 이경은의 은퇴로 승부처에서 활약할 수 있는 카드는 더 줄었다. 또한, 팀 최다 득점자였던 리카가 은퇴를 한 만큼, 아시아쿼터 드래프트에서 최소 리카 이상의 활약을 할 수 있는 선수를 뽑아야 한다. 홍유순, 이두나, 허유정 같은 젊은 선수들의 가능성을 더 높이고, 중견 선수가 된 김지영과 김진영, 신이슬의 효과적인 활용 방법도 신한은행이 비시즌에 반드시 찾아내야 할 포인트다.
6. 하나은행 (9승 21패 6위)
뼈아픈 시즌이다. 다시 최하위가 됐다. 하나은행은 2023-24시즌, 4위를 차지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과거 챔프전까지 올라간 적이 있지만, 첼시 리 사건의 후폭풍으로 기록에서 삭제됐다. 공식적으로는 창단 후 첫 플레이오프 진출이다. 정규리그 승률이 33%밖에 되지 않았고, 플레이오프에서도 선두 KB에게 3경기 만에 고배를 마시며 광탈하기는 했지만 누구도 하나은행이 23-24시즌을 실패라고 하지 않았다. 항상 가능성의 영역에만 존재했던 하나은행이 비로소 결과를 얻어낸 시즌이었다. 김정은이 정신적 지주로서 확실한 역할을 해주면서 유망주들이 한 발 더 내 디딜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됐다. 따라서 2024-25시즌은 하나은행에게 매우 중요했다. 2년 연속 봄 농구에 진출한다면, 젊은 선수들이 꾸준한 자신감으로 장기적인 청사진을 만들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할 수 있다. FA 시장도 나쁘지 않았다. 최대어였던 진안을 잡았다. 이후 격변의 시장 변화가 일어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은행의 시장 수확이 손해였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은행은 양인영-진안-김정은을 구성하면서 페인트존에서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 확실한 높이를 앞세워 인사이드를 지배하는 형태는 현대 농구의 트렌드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또한 역대 하나은행 역시 높이의 강점으로 경기를 풀어갔던 팀은 아니다. 팀의 에이스 롤을 수행했던 강이슬과 신지현은 모두 외곽에 있을 때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WKBL에서는 페인트존 장악력이 상당한 강점이 될 수 있다. 비교 우위에 있는 부분은 확실하게 활용해야 한다. 베스트 라인업에 이름을 적을 센터가 마땅치 않은 팀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국가대표를 오가는 전성기 연령대의 빅맨이 둘이나 있다는 것은 엄청난 강점이다.
일부에서는 양인영이 있는 가운데 진안이 합류하면서 이들의 동선이 겹칠 수 있음을 우려했지만, 사실 큰 문제가 있는 조합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양인영과 진안 모두 센터로 등록되어 있지만, 이들 모두 골밑에 머무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다. 상황에 따라 포스트와 어라운드를 적절히 활용할 수 있다. 진안이 운동 능력과 피지컬, 공격에서 강점이 있는 반면 양인영은 미들슛과 수비에서 자기 역량을 가져갈 수 있다. 박지수(KB), 김단비(우리은행)와 더불어 현역 선수 중 블록 능력은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노련한 김정은이 중심을 잡아주면 승패를 떠나 적어도 포스트 싸움에서는 꾸준히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단순히 말해, 외곽을 수없이 두드려 맞더라도, 안쪽만 철저하게 공략하고 지켰다면 9승보다는 훨씬 많은 승리를 챙겼을 것이다. 하나은행은 리그에서 유일하게 평균 리바운드가 40개 이상이었던 팀이다. 전체 야투의 64.4%를 3점 라인 안에서 시도했다. 삼성생명(65.6%)에 이어 두 번째로 2점슛 비율이 높았다. 자신들의 장점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2점 야투율이 41.2%에 그쳤다. 6개 팀 중 5위. 3점 슛 성공률도 22.3%로 최하위였던 하나은행은 강점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고, 기본적인 야투가 크게 흔들리면서 힘든 시즌을 보냈다. 부상으로 인한 어려움도 있었다. 인사이드 빅3라 할 수 있는 양인영-진안-김정은이 모두 정상 가동 된 경기가 많지 않았다. 세 명 모두 부상에 시달렸다.
강점은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약점은 확연하게 나타났다. 하나은행은 신지현을 보상 선수로 내보내며 비시즌부터 가드와 외곽에 구멍이 생겼다. '슛 좋은 리딩 가드'가 필요했다. 다행히 아시아쿼터를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일본 가드 자원들 중에 충분히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수요였다. 하지만 아시아쿼터는 하나은행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전체 3순위로 선발한 와타베 유리나는 시즌 시작도 하기 전에 돌아갔다. 그나마 2라운드에 선발한 이시다 유즈키가 27경기에서 평균 22분 이상을 소화했지만 평균 6.1점, 1.9어시스트, 3점슛 성공률 21.5%로 하나은행의 고민을 해소해주지는 못했다. 국내 가드들도 마찬가지. 정예림, 김시온, 박소희, 고서연 등을 활용했지만 확실한 1번은 끝내 나오지 못했고, 10경기 이상 출전한 외곽 자원들 중 3점 야투율이 30%를 넘긴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팀 내에서 가장 3점슛 성공률이 높았던 것은 센터 양인영(7/14, 50%)이었다.
개막전에서 자신들이 지명한 '꼴찌 0순위' KB에게 덜미를 잡힌 하나은행은 삼성생명과 신한은행을 잡으면서 반등하는 듯 했지만, 내리 6연패를 당하며 최하위로 내려 앉았고, 마지막까지 반등하지 못했다.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심기일전하는 모습이 필요했지만, 오히려 이 시기에 7연패를 당하며 사실상 순위 경쟁력을 상실했다. 그나마, 리그가 3강 3약의 형태로 재편되면서, 3할대의 승률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플레이오프를 노릴 수 있는 상황이 이어졌지만, KB-신한은행에게 4위 싸움의 전장을 내주고 다시 최하위로 내려앉았다.
하나은행에게 정공법은 무리로 보인다. 당장은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과거 정상일 감독 시절의 신한은행이 가장 적절하게 사용했던 방법이고, 24-25시즌 후반기에는 KB가 이에 부합했다. 하나은행은 시즌 전체에 대해 확실한 선택과 집중으로 운영 방법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플레이오프 진출을 위한 승수를 산정하고, 시즌 전체 일정 속에서 반드시 잡아야 할 경기를 미리 선택해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단순히 '라운드 당 몇 승'이 아니라, 반드시 이겨야 할 경기를 설정하고 이에 대한 플랜A와 1차적 계획이 틀어졌을 때의 다음 계획도 마련하야 한다. 팀 전력이 상위권 싸움을 할 수 있는 상황이거나, 팀 목표가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리빌딩이라면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하나은행은 창단 이후 14년째 리빌딩만 하고 있는 상황이 되어 버렸기에, 무엇을 하든 플레이오프 진출은 당면과제가 된 상황이다. 양인영-진안의 더블 포스트와 베테랑 김정은의 효율적인 활용 방안을 모색해야 하며, 확실한 약점인 1번과 외곽의 고민을 풀어야 하는 팀 전력상의 구조적인 문제 해결과 더불어 시즌 전체 운영 방법에서 지혜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사진 : WK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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