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Antasize | 글/iNside sports

[프로야구] 만약 현대가 서울 욕심을 버렸다면...

728x90

프로 스포츠에서는 항상 서울이 말썽인가 보다. 연고지 문제에 있어서 서울은 늘 뜨거운 감자다. 대한민국의 수도라는 것 외에도 이 나라의 정치, 경제의 중심이고, 인구의 30% 가까이가 집중되어 있는 절대적인 영향력 때문에 프로 팀들에게 서울은 언제가 강력한 메리트를 갖게된다. 서울공동화 정책으로 연고 구단을 비워놓고 있던 축구에서는 FC서울의 창단(창단이라 쓰고 연고이전이라 읽는다) 과정에서 적지않은 내홍을 겪었다. 수많은 축구팬들의 격렬한 반대와 항의 속에서도 꿋꿋이 협회와 LG는 제 갈 길을 갔으며, 결국은 그들의 의도대로 시간이 적당히 흐른 지금 FC 서울의 서울 연고는 그다지 문제로 삼지 않는 분위기가 되었다. 오히려 당시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과거에 집착하는 이상한 사람들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후의 흐름을 보면 이 팀이 숱한 비난 속에서도 서울로 연고지를 옮긴 것은 결과적으로 잘한 것이라 자평해도 할 말이 없다. '서울을 연고로 한다'는 점 때문에 누리고 있는 이익이 쏠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야구는 어떨까?

 

 

 

1. 서울의 주인 - MBC 청룡, 그리고 OB 베어스

프로야구 초창기에 처음 서울 연고권을 획득한 것은 두산그룹이었다. 두산그룹의 모태는 두산상회다. 친일파로 유명한 박승직은 경기도 광주 출신이지만, 1890년 현재의 종로4가로 볼 수 있는 배오개에 '박승직 상점'을 창업했고, 이 상점이 추후 두산상회가 된다. 박승직의 아들인 박두병이 '박승직 상점'을 인수한 후 동양맥주를 설립했고, 박승직 상점을 '두산상회'로 재개업했는데, 이것이 현재 두산그룹의 모태이며, 박두병은 두산그룹의 초대회장이다. 따라서 두산그룹은 회사의 모태도 기반이 서울이었고, 초대회장 박두병은 경기도 경성부, 곧 지금의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한국 프로야구 출범 당시 전두환 정부가 요구했던 서울 지역 구단을 운영하기에 부합하는 조건이었다. 박두병 초대회장의 아들인 박용곤은 특히 미국 유학파 출신으로 야구에 대한 애정이 깊어, 적극적으로 야구단 유치에 나섰고, 가장 먼저 창단식을 열었다. 두산 그룹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동양 맥주의 브랜드인 OB를 이름으로 걸고 모기업의 연고지인 서울을 홈으로 연고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6개구단의 창단 준비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대전-충남 지역의 연고권으로 창단을 준비하던 동아그룹이 그룹 내부 사정으로 야구단 창단을 철회했고, 5개구단 밖에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또한 군부 독재 정권과 함께 프로야구 출범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MBC가 자신들이 서울 연고권을 갖겠다고 나섰다. 프로야구 창단과 아울러 방송사의 지원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었고, MBC의 창단은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절대적인 요소였다. 이는 농구가 프로화되는 과정에서 SBS가 창단 했던 것과 궤를 같이 한다. MBC는 당시 SBS와 마찬가지로 한시적으로 야구단을 운영할 것으로 천명했고, 방송사 본부가 서울에 있는 만큼 서울 외의 지방에서는 창단이 힘들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그리고 정부와 함께 압력을 행사해 서울 연고권을 확보했다. 

결국 이때 두산그룹은 비어있던 대전을 한시적으로 홈으로 쓴다는 3년의 약정을 하고, 프로야구는 6개구단의 틀을 갖춰 1982년에 출범할 수 있게 되었다. OB는 6개구단 중 제일 먼저 창단식을 하는 등 (1982년 1월 15일) 야구에 쏟는 열정이 남달랐다. 그리고 당초 약정에 따라 1985년부터 서울로 연고지를 옮겼다.

그러나 MBC의 야구단 매각은 OB의 서울 입성과는 다소 다르게 돌아갔다. 출범 당시의 초대구단주였던 이진희 사장은 "프로야구가 정착될 때까지 3년간만 프로구단을 운영한다"고 했지만 정치 논리에 맞춰 프로야구가 창단한 만큼, 전두환 시절에는 매각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태우 정권 이후 황선필 구단주는 방송사의 자금 압박과 MBC의 성적 부진을 이유로 매각을 결정했다. 그러나 MBC의 매각을 위해서는 서울 연고권의 존속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또한 OB가 서울로 옮기면서 남아있던 대전은 빙그레 이글스가 창단과 동시에 연고로 사용을 한데다가 이미 OB와 MBC가 5년 이상 함께 연고로 사용한 만큼 두 팀이 함께 서울을 연고로 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는 주장 속에 MBC를 인수하는 구단에게도 연고권이 돌아가게 됐다.

당시 MBC로부터의 야구단 인수에 뛰어든 곳은 진로유통, 현대, 대우, 한일그룹등이었지만 이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야구단 창단에 관심을 가졌던 럭키금성이 인수에 성공했다. 럭키금성은 이미 당시 3개 프로스포츠 중 축구와 씨름을 운영하고 있었고, 그룹 마케팅 차원에서 야구의 효과가 가장 강력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MBC의 인수와는 별도로 8번째 구단으로서의 창단도 고려하고 있었다. 결국 1990년부터 MBC는 럭키금성 야구단이 LG라는 이름으로 인수하게 되었는데, LG 트윈스는 럭키금성 그룹 계열사들 중 최초로 LG라는 이름을 브랜드 타이틀로 채택한 경우였다.

많은 야구팬들이 애초 서울의 연고권은 LG의 것이었고 어느날 갑자기 두산이 더부살이 하듯이 밥상에 숟가락 얻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절대적으로 잘못된 상식이다. 전두환 정부의 압력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두산 그룹 양보가 없었다면 한국프로야구는 1982년에 정상적으로 출범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산은 지금까지도 '서울로 슬쩍 연고를 옮긴 구단', '대전을 버린 배신자'라는 오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2. 서울 야구의 만개 - LG 트윈스, 두산 베어스

1982년 원년의 우승을 동대문 운동장에서 OB 베어스가 차지했으나, 당시 OB의 연고지는 어쨌든 대전이었다. OB는 분명 획기적인 사건을 최초로 많이 만든 팀이었다. 최초의 프로야구단 창단 선언, 최초의 프로야구단 창단식, 최초의 프로야구 MVP (박철순)와 한국시리즈 MVP (김유동) 배출, 프로야구 1호 신인왕 (박종훈) 배출 등 시발점이 된 타이틀을 대부분 가져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원년 이후 OB의 성적은 중위권 이하에 늘 머물렀다. 전후기제로 나눠 펼쳐진 초반, OB는 1984년 후기리그에서의 분전으로 원년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었지만, 전기리그 우승팀이었던 삼성이 OB를 피하기 위해 롯데에게 져주기 게임을 펼치는 촌극은 연출하여, 한국시리즈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삼성은 계획은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최동원의 괴물투와 유두열의 쓰리런 홈런을 앞세운 롯데가 자신들을 선택한 삼성을 보란듯이 무너뜨리고 정상에 올랐다. 창단 후 꾸준히 리그 최정상급의 전력을 갖췄지만, 한국시리즈 우승은 2002년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차지하지 못한 삼성에게는 계속 '해태의 저주' 만큼이나 '져주기의 저주'라는 오명이 따라다녔다.

아무튼 OB는 1984년 통합 성적에서 최고 승률을 기록했지만 한국시리즈에도 오르지 못하고 3위에 그쳤는데(당시는 전기르기와 후기리그로 나눠져 있었음), 이것이 원년 이후 OB가 거둔 1980년대 최고 성적이었다. MBC 역시 1983년, 후기리그를 우승하여 한국 시리즈에 올랐으나 해태에 패한 것이 최고 성적이었고, 이후 3위 이상의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MBC의 야구단 매각 이유에 '저조한 성적'이 포함되었겠는가? 하지만 매각이 이뤄진 1990년, 럭키금성이 인수하면서 LG로 간판을 바꾼 후, 놀라운 기적을 연출한다.

LG는 MBC를 인수하자 마자 당시 한국 야구의 철옹성과 같았던 해태 타이거즈 왕조의 5연패를 저지하며 팀명을 바꾼 첫 해(창단 첫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우승을 차지했다. 물론 이 이후 LG 야구도 주춤하긴 한다. 하지만 같은 서울을 쓰고 있던 OB는 당시 2년연속 최하위를 기록하는 등 절망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에 LG의 위세는 대조적으로 더 놀라웠다. 그리고 대망의 1994년. LG는 한국 프로야구사에 획기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1990년 우승 이후 6위-7위-4위에 머물렀던 LG는 1994년, 압도적인 위용을 과시하며 두번째 우승을 이뤘다. 그 중심에는 한국 야구사에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신인들의 동시다발적인 대폭발이 있었다.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의 젊은 트리오는 신인이었음에도 LG의 1,2,3번 타순에 위치해서 엄청난 폭발력을 가져왔다. 한국 4번타자의 전설 한대화를 비롯해 김선진, 김영직 등의 노장이 버티고 있었고, 이후 한국 야구의 대표적인 선수들로 올라선 김동수, 노찬엽, 최훈재, 송구홍, 박종호, 박준태 등이 버티고 있었으며, 은퇴 후 다시 선수로 돌아온 김정민도 있었다. 마운드에서는 선동렬 이후 최고의 언터쳐블의 위용을 과시했던 야생마 이상훈을 필두로, 정상흠, 김태원 등 10승 투수가 4명이나 있었고, 김기범, 차명석, 차동철, 인현배등이 뒤를 받쳤으며, LG의 영구결번 김용수가 뒷문을 지켰다.

당시 팀을 이끌었던 이광환 감독의 자율야구는 1994년을 기해 '신바람 야구' 라는 이름을 만들었고, 이 때의 LG 야구는 한국 야구팬들의 평균 연령대를 낮추고, 여성팬들의 비율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최다 우승에 빛나는 해태와 영원한 '구도' 부산의 롯데, 그리고 최근 막강의 위용을 떨친 SK도 이 때의 LG만큼 단기적인 팬 층의 폭발력과 이후의 패러다임 변화를 만들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어진 1995년에는 OB가 13년만에 우승을 차지한다. 한국시리즈에서 롯데를 만나 우승을 확정 지은 OB는 절대 강자라 부르기에는 다소 모호한 상황이었다. 물론 당대 최고 투수자리를 놓고 이상훈에게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에이스인 김상진을 비롯해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박철순과 장호연, 권명철, 강병규가 있었고, '미스터 베어스'로 불리던 김형석을 비롯해 최초의 서울 홈런왕 김상호, 소년장사 심정수와 스위치 히터 장원진, 미치도록 빠른 신예 정수근이 있었지만, 그 위용은 LG에 다소 모자란 느낌이었다. 특히 맞대결에서 OB는 LG에게 조금씩 밀리는 모습이었고 에이스 대결에서도 김상진이 이상훈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OB가 마지막 뒷심으로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하면서 변수가 생겼다. 당시 먹이 사슬은 LG가 OB에 강한 반면 롯데에 약했고, 롯데는 LG에 강한 반면 OB에 약했던 것. 당연히 시즌 막판까지 1위 자리를 놓고 OB와 LG는 첨예하게 대립했고, 가까스로 1위를 OB가 차지하면서 LG의 2연패가 수포로 돌아갔다. 정규리그에서의 먹이 사슬이 포스트시즌에도 정확하게 작동했다. 2위 LG는 3위 롯데에게 플레이오프에서 고배를 마셨고, 롯데는 한국시리즈에서 OB를 넘지 못했다.

1994년과 95년, 연거푸 서울팀이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며 서울의 야구팬들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LG의 94년 우승은 젊고 역동적이며 자극적인 색체를 띄며 새로운 야구팬들과 젊은층, 그리고 여성팬들을 야구장으로 불러모았고, OB의 95년 우승은 박철순의 눈물과 더불어 원년의 향수를 안고 있는 올드팬들을 야구장으로 다시 이끌었다. 95년 OB의 우승 이후, 한국 프로야구의 흐름은 해태가 쥐고 있던 절대권력이 태평양을 인수한 현대 유니콘스로 넘어가는 상황으로 전개됐다. 송진우-정민철-구대성을 앞세운 한화가 1999년에 우승을 차지했지만, 90년대 후반은 해태의 마지막 연속 우승이 있었고, 인천 야구의 원을 푼 현대가 98년에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현대는 1998년 우승 이후 철벽 마운드를 앞세워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야구의 절대 강자로 등극한다.

그러나 LG와 OB역시 크게 타오른 서울 야구의 인기를 놓치지 않았다. 성적이 들쭉날쭉했지만 1994년 한국 야구를 완전히 제압했던 LG는 저력이 있었다. 우승의 원동력이었던 신인 3인방은 LG의 중심으로 성장했고, 젊은 피들의 겁없는 플레이는 야구장을 칮는 많은 팬들을 열광시키며 LG를 최고 인기 구단으로 성장시켰다. 1995년 이후 다소 주춤했던 두산은 빅볼 야구로 새로운 트랜드를 열며 1998년부터 이미지를 바꾸는데 성공했다. 원년 우승팀이었지만 OB-두산의 이미지는 강팀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들이 앞세운 키워드는 뚝심이었다. 원년 우승 이후 한국시리즈에 오르는 데까지 14년이 걸린 OB는 김인식 감독 체제가 들어서면서 조금씩 강팀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우즈-김동주-심정수로 이어지는 중심 타선과 정수근의 빠른 발, 홍성흔이라는 새로운 인기 스타의 등장은 LG에 비해 고루한 느낌이 강했던 OB의 분위기를 일신하며 기존의 '뚝심' 이미지에 강한 첨가제 효과를 더했다. 이 시점에 두산은 동양맥주를 매각하게 되며 더 이상 OB라는 이름을 쓸 수 없게 되어, 1999년 부터는 두산이라는 이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LG와 두산은 올드 유니폼 이벤트를 한다 해도 원년의 MBC나 OB라는 이름을 쓸 수 없다는 안타까움은 남는다.

이후 두산은 2000년과 2001년 드라마같은 한국시리즈의 역사를 쓰며 밀레니엄을 넘기며 인기몰이의 한 축으로 이미지를 공고히했다. 2000년 당시 최강의 위용을 자랑하던 현대와의 한국시리즈에서 내리 3연패를 당한 뒤 3연승을 거뒀지만 결국 최종전에 패하며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 해 두산은 플레이오프에서 LG와의 지하철 시리즈를 심정수의 만화같은 홈런쇼로 이어가며 위세를 떨쳤고, 비록 한국시리즈에서 패했지만 "우승으로 기억되는 승부는 많아도, 감동으로 기억되는 승부는 흔치 않습니다" 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남겼다. 준우승 후 팬들 앞 응원단상에 직접 올라, "오늘의 눈물을 내년에는 기쁨의 눈물로 바꿔드리겠다"고 약속한 두산은 절대 약세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2001년 준플레이오프부터 한화-현대-삼성을 차례로 쓰러뜨리며 대반란의 역사를 만들었다. 특히 1982년 원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의 이선희를 상대로 OB 김유동이 쳐냈던 만루홈런 이후 두 번 째 한국시리즈 만루홈런을 거의 20년의 시간을 건너, 팀 후배 김동주가 그때와 같은 상대 팀 삼성의 박동희를 상대로 쳐내며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었고, 타이론 우즈는 삼성의 김진웅으로 부터 잠실구장 비공인 장외홈런을 커다랗게 때려냈는데, 이 타구는 당시 방송 카메라도 따라가지 못했으며, 잠실 외야의 조명탑 아래를 뚫고 지나가는 어메이징 스토리를 만들었다.

2002년은 LG의 차례였다. LG 역시 절대 약세의 평가속에서도 김성근의 데이터 야구를 바탕으로 한국시리즈에 올라 우승에 목말랐던 삼성과의 끈질긴 승부를 펼쳤지만, 이승엽의 동점 홈런과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으로 가장 극적인 패배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2002년 LG의 투지와 근성은 분명 놀라운 것이었고, 이전까지 세련미와 겉멋에만 치중한 빛좋은 개살구라는 일부의 비판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김성근 감독을 구단 수뇌부에서 '신바람 야구를 지향하는 구단의 색깔과 맞지 않는다' 며 경질했고, 이후 긴 암흑기에 빠졌다. 'DTD의 대명사'이자 객관적 전력 여부를 떠나 그냥 안되는 팀이라는 비난과 무시는 2023년 우승 때까지 꾸준히 계속됐다. 하지만 어쨌든 LG와 두산이 1990년대 중반 이후 서울 야구의 붐을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3. 제 3자의 시선 - 현대 유니콘스

(1) 발원

LG와 두산이 양분하던 서울을 꾸준히 바라보는 또다른 시선의 주인공은 바로 1997년 태평양을 인수한 현대 유니콘스였다. 이미 1989년 당시 MBC의 매각에 관심을 보였던 현대는 축구, 농구, 배구에는 이미 팀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야구만은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현대 피닉스를 창단하며 아마 야구를 평정하는 등 프로야구 팀 창단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1997년 태평양을 인수해 인천을 연고로 프로야구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명투수의 터전으로 일컬어졌던 인천 선수들을 바탕으로 짠물 마운드를 구축하며 해태로 부터 한국 야구의 왕좌를 이어받기 시작했다.

현대는 1997년 태평양을 인수하여 1998년에 첫 우승을 차지했다. 1999년에는 비록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2000년에 두번째 우승을 차지했고, 2001년과 2002년 잠시 숨고르기를 한 후 2003년과 2004년, 2연패에 성공하여, 기아(해태 시절 포함)에 이어 두번째로 4회 우승을 차지한 구단이 되었다. 물론 태평양 시절이 있었고, LG는 MBC를 인수한 직후 바로 우승하기도 했지만, 현대처럼 짧은 기간에 적극적인 선수 영입과 변화를 통해 정상급 전력을 갖추고, 또 이를 토대로 한동안 꾸준한 성적까지 도출해 낸 사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기업의 재정난으로 전체적으로 인한 악화일로에 성적까지 추락했고 KBO의 지원으로 전전하는 사태에 몰렸다가 결국 해체되었고, 히어로즈라는 이름으로 인수되어 2008년부터 운영되고 있다.

 

(2) 머니 게임의 중심에 서다

태평양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갑자기 강력한 위치를 점하게 된데는 당연히 연고 지역내의 우수한 투수 자원이 큰 몫을 했지만, 역시나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운 선수 영입도 한 몫을 했다. 특히 삼성이나 LG 같은 재계 라이벌들을 반드시 제압하겠다는 모기업이나 현대그룹 오너가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야구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故 정몽헌 회장의 의지는 확고했고, 이러한 현대의 등장은 삼성 역시 막대한 자금력을 소모하게 되는 촉발점이 되었다. 어쨋든 투자한만큼 거둬들이는 것이 정당한(?) 자본주의의 프로 스포츠인 만큼, 현대와 삼성은 2000년을 즈음하여 확실히 전력적인 상승을 이루게 되었다. 다만 현대와 삼성은 타팀 팬들로 부터 '돈대'와 '돈성' 이라는 비아냥을 받긴 했다. 특히 두 팀의 맞대결은 경기 전부터 선수들에게 특별 보너스가 포상으로 걸릴만큼 상당한 라이벌리로 긴장감을 높이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머니게임이 반대급부로 현대의 발목을 잡았다. IMF 이후 하이닉스 반도체 사태 등 현대 계열사의 위기가 닥쳐왔고, 현대라는 대재벌 기업도 경영 위기에 봉착했다. 이에 따라 현대는 자신들이 애지중지 키운 최고 유격수 박진만을 라이벌 삼성에게 FA로 내줘야 하는 수모까지 겪는다. 게다가 모기업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야구단을 절대로 놓지 않겠다고 했던 정몽헌 회장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치면서, 마지막 후원자까지 잃은 현대는 '돈대'에서 '빈대'라는 비아냥에 내몰리며 어려운 시기를 맞이한다. 거의 3-4년을 미운 오리새끼 마냥, KBO와 현대 계열사간의 떠넘기기 같은 힘겨루기에 끼어서 안타까운 시간을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정몽헌 회장의 뒤를 이은 오너들은 누구도 이 야구단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3) 만신창이가 되어 이룬 서울찬가

모기업의 경영 위기와 정몽헌 회장의 작고가 치명적이었지만 그 배경을 따지면 현대의 몰락에는 다른 이유도 존재했다. 연고지에 대한 욕심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연고지 이전을 추진하는 과정에 어려움이 닥치면서, 연고지와 관련한 현대의 결정은 커다란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인천에 연고를 둔 태평양을 인수했지만 현대는 항상 서울로의 연고 이전을 원했다. 당시 쌍방울을 인수하여 서울로 입성하려던 SK(현재는 SSG)를 막아서며 서울 연고를 추진하던 현대는 결국 SK가 인천에 들어오고 자신들이 서울의 제 3구단이 되는 것으로 합의를 이뤄내며, 기존에 자신들이 갖고 있던 연고권을 SK에 매각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 터져버린 모기업의 경영난은 현대를 낙동강 오리알로 만들었다.

현대가 서울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두산과 LG에 연고에 대한 부담금을 납입해야 한다. 이는 기존의 연고권을 새 구단에게 나누어 줘야 하는 두 구단에 대한 당연한 절차이며, KBO의 주관 아래 해당 구단들은 금액까지 명기하여 합의를 했다. 하지만 갑작스런 모기업의 경영난으로 현대가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서울 입성 전까지 한시적으로 수원을 홈으로 쓰게 됐지만, 인천-경기-강원에 이르던 기존의 연고권은 이미 SK에 팔아버렸고, 서울 지역의 연고권은 해당 금액을 납부하지 못하여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당시 드래프트는 프로 구단들이 자신들의 연고 지역에서 1차 지명을 우선적으로 할 수 있게 했다. 성적의 역순으로 지명권을 행사하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드래프트는 연고지 1차 지명을 마친 후에 진행됐다. 연고권이 없어진 현대는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연고지역 1차지명을 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지역 내 최고 선수를 뽑을 권리를 7년 동안이나 행사하지 못한 현대는 전력 보강에 큰 암초를 맞이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는 꿋꿋하게 버텨냈다. 2003년과 2004년에 리그 2연패를 했고,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신인 1차 지명을 못했음에도 3년 연속으로 신인왕을 배출해냈다.(조용준-오재영-이동학) 그러나 결국 한계에 이른 현대는 2000년을 즈음하여 이룩했던 왕조의 막강함을 지속하지 못한 채 부침을 거듭하다가 히어로즈로 매각되었다. 그러면서 오매불망 바라던 서울 입성을 이루어 냈지만 이것으로 현대 시절 부터 꿈꿨던 바를 이뤘다고 평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우선, 긴 시간 동안의 부침은 인천 지역의 팬들이 현대와 히어로즈로 이어진 역사를 '배신'으로 규정하는 이유가 된다. 특히 한동안 현대와 SK를 놓고 고민하던 인천팬들은 SK의 탁월한 성적과 연고 정착을 위한 이벤트, 노력 등으로 확실히 SK의 손을 들어 주었으며, 현대를 이어 서울에 입성한 히어로즈에 대해 '배신자' 라는 확실한 주관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현대는 강력한 투수진을 앞세운 지키는 야구와 전성기 시절에 보여졌던 김재박 야구의 치밀함이 갖는 부작용으로 말미암아 '재미없는 팀'으로 낙인 찍히며 비인기 구단이 되어 버렸다. 거듭된 홈구장 이전으로 인천은 물론 수원지역에서도 외면을 당했다. 2003년 현대가 우승하던 시절의 한국 시리즈는 '전경기 매진에 실패'라는 KBO 초유의 사태를 기록했으며, "한국 야구 발전을 위해서 현대 같이 연고 의식 없는 팀은 절대 우승해서는 안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수원에서도 현대를 위해 여러 편의를 봐주며 노력했지만 오매불망 서울만 바라보는 현대에 대해 서운함을 표했고, 연고 지역의 학생들이 모두 SK의 1차 지명권에 해당하는 만큼 기반이 되는 지역의 팬도 존재하지 않았다. 수원은 결국 한참을 기다려 2013년 KT 위즈가 창단하면서 한을 풀었다.

 

히어로즈의 이름으로 서울에 입성을 하긴 했지만, 이미 단단하게 터를 잡은 두산과 LG의 팬 층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도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지금은 고척돔을 사용하며 안정을 찾았지만, 초기에는 프로 경기에 적합하지 않은 목동 야구장을 사용하며 구설이 있었고, 당시 고척돔 사용과 관련해, 서울시-KBO와 첨예한 대립을 빚기도 했다. 서울에 터를 잡고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두산과 LG가 골수팬들이 많고 바람몰이에 강하다는 것이 히어로즈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원래 새로운 야구팬들은 기존의 야구팬들의 손에 이끌려 야구장을 방문했다가 그들과 같은 팀의 유니폼을 입고 열광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글을 처음 썼던 2009년에 <히어로즈의 기반은 너무나 사상누각인 샘이다. 결국 히어로즈의 서울 정착과 관련한 성패는 '성적'과 '스타'에 의해 좌우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기존의 인기에서 LG와 두산을 넘어서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라고 정리한 바 있다. 다행히 히어로즈는 이후 젊은 스타들의 육성에 성공했고, 현실적인 셀링 클럽의 한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지만, 무려 7명이나 메이저리그에 진출시키면서, 나름의 생존 전략을 찾아냈다.

 

(4) 현대가 인천에 남았더라면... 

만약 SK가 서울의 제 3구단이 되고 현대가 꾸준히 인천 연고로 남았더라면 어땠을까? 만약이라는 가정이 필요 없는 스포츠에서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되집어 본다면 현대에게는 분명 안타까움으로 남을 만한 일이었다. SK가 서울의 제 3구단이 되었다면 어떤 변화를 가져갔을까에 대해서는 장담이 어렵다. 다만 적어도 두산이나 LG가 꾸준한 전력을 구성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SK는 현대처럼 7년간 연고 지명을 사용하지 못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두산으로서는 임태훈과 이용찬을 한꺼번에 1차 지명으로 데려오는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반면 현대 역시 연고지를 버리지 않았다면 인천-경기-강원 지역의 연고권을 그대로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현대는 2차 지명으로도 충분히 쏠쏠한 선수들을 구성해내는 능력을 보였다. 현대가 1999년 이후 2차 지명으로 선발한 선수들 중 괜찮은 활약을 거든 선수들은 다음과 같다.

 

 

연도 선수
1999년 이종욱 (2라운드 16순위), 이택근 (3라운드 17순위), 송신영 (11라운드 81순위)
2000년 이동학 (1라운드 4순위), 오윤 (2라운드 13순위), 김성태 (6라운드 45순위), 신철인 (10라운드 76번)
마일영 (1라운드 1순위 / 쌍방울이 지명했으나 지명하자마자 현대로 현금 트레이드-지명권 양도)
2001년 손승락 (3라운드 25순위 / 군 복무 - 경찰청), 허준 (6라운드  44순위)
2002년 이현승 (3라운드 26순위), 장원삼 (11라운드 89순위)
2003년 노환수 (3라운드 22순위)
2004년 오재영 (1라운드 5순위)
2005년 차화준 (1라운드 8순위), 이보근 (5라운드 39순위)
2006년 강정호 (1라운드 8순위), 황재균 (3라운드 24순위), 조용훈 (4라운드 32순위), 유선정 (6라운드 48순위)
2008년 김성현 (1라운드 6순위)

 

 

이 중 이동학과 오재영은 신인왕을 차지했다. 2002년 신인왕인 조용준 역시 현대가 1998년 2라운드 5순위로 지명한 선수였다. 이쯤되면 현대의 2라운드 선수 지명의 결과과 상당히 쏠쏠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2000년 즈음의 현대는 그야말로 막강 그 자체였다. 2000년 당시 현대는 91승 40패의 성적으로 7할에 육박하는 승률을 기록한다. 그때까지 한국 프로야구사에 이보다 높은 기록은 프로 원년 우승을 차지했던 시절의 OB와 1985년 통합 우승을 차지했던 삼성 밖에 없다.   

당시 현대에는 최고의 테이블 세터였던 전준호와 박종호, 그리고 두산에서 데려온 심정수와 '괴물 ' 박재홍, 김재박-유지현의 계보를 잇는 최고 유격수 박진만이 버티고 있었다. 또한 유독 용병을 잘 뽑았던 현대에서는 매년 거쳐가는 외국인 선수들마다 대부분 성공적인 자취를 남겼다. 용병 첫해에 좋은 타격을 보여준 스콧 쿨바를 비롯하여 퀸란, 레리 서튼, 클리프 브룸바가 장쾌한 슬러거로 명성을 떨쳤고, 바워스, 피어슨, 켈러웨이 등 투수들은 모두 10승 이상과 3점대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그 외에도 현재 SSG의 감독인 이숭용을 비롯해 송지만, 김동수와 FA 자격으로 LG 옷을 입은 정성훈, 친정으로 돌아간 SK의 박경완 등 절정의 기량을 구가하는 선수들이 현대의 주축으로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심재학, 이명수, 채종국도 화려한 시대를 수놓았던 선수였다.

또한 현대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막강 투수진에는 정민태-김수경-임선동으로 대표되는 막강 선발라인에 조웅천, 조규제, 조용준으로 이어지는 마무리 라인이 대를 이어 존재했고, 매년 화수분 처럼 등장한 신인 투수들이 그 뒤를 받쳤다. 조융준과 더불어 신인왕 3연패를 이룬 오재영, 이동학은 물론 송신영, 신철인, 전준호, 이상열 등이 당시 최강 현대를 구성했던 투수들이었다. '화수분'은 이후 신인 발굴과 육성에서 최고로 꼽힌 두산을 칭하는 단어가 됐지만, 이 시기의 현대는 특히나 신인 투수 발굴과 육성에 일가견이 있는 팀이었다.

 

(5) 인천 연고의 1차 지명권

현대로 부터 연고권을 이어 받은 SK의 선택이 결과적으로 모두 성공은 아니었으므로, 현대가 여전히 지명권을 갖고 있었어도 이렇게 되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투수를 선택하고 육성하는 능력이 남달랐던 현대였다면 어땠을 지 모르는 것이고, 또한 현재의 결과에서 역순으로 짚어보는 것이니 그저 가능성에 관한 부분으로만 남을 얘기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만약 현대가 인천 연고권을 그대로 갖고서 인천-경기-강원 지역의 1차 지명권을 행사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현대가 1차 지명을 행사하지 못한 2003년 부터, 얄궂게도 인천-경기-강원 지역에서는 현재 한국 야구를 뒤흔드는 투수들이 속속 등장했다.

 

- 송은범 (2003년, 동산고 / SK 1차 연고 지명)
SK 시절 실질적 에이스 역할도 했던 송은범은 2003년 인천 연고 지역 최고의 카드였다. 당시 SK는 1차 지명권을 통해, 송은범-임준혁 (동산고 / 기아) - 장순천 (부천고 / 한화) 등을 선택할 수 있었으나, 가장 돋보이는 카드였던 송은범을 지목했다. 2003년 데뷔한 송은범은 불혹을 넘긴 현재도 선수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2013년 기아를 시작으로 한화, LG를 거쳐 2024년부터 삼성에서 활약 중이다. 현재까지 694경기에 출전해 통산 88승 95패 27세이브 59홀드를 기록했고, 평균 자책점은 4.55다. 20년이 넘는 프로 생활과 SK 시절의 임팩트를 생각하면 통산 커리어에서 남긴 기록은 다소 아쉬울 수 있다. 프로 통산 10승 이상을 기록한 것은 2009년 뿐이다. 하지만 데뷔 후 10시즌을 활약했던 SK 시절은 확실한 선발 카드로 위력을 보였던 선수다.

- 윤석민 (2005년, 야탑고 / 기아 2차 1라운드 6순위 지명)
프로 데뷔 직후 중간과 마무리를 오갔으나 3년차였던 2007년 이후 확실한 선발 투수로 떠오르며, 한때 대한민국 최고 우완 투수 중 한명으로 평가 받았다. 윤석민은 2005년 신인 드레프트에서 연고 지명을 받지는 못했다. 연고권을 갖고 있던 SK는 최정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최정은 뛰어난 활약으로 SK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20년간 한 팀에만 머물며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다. 다만, 이 해에 2차 1라운드 6순위로 기아에 지명된 윤석민도 이후의 행보를 보면 지명 결과는 윤석민이 다소 평가 절하됐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지명된 선수들 중 윤석민보다 확실한 족적을 남긴 이는 5순위로 삼성에 지명된 오승환(경기고-단국대)이 유일하다. 롯데의 조정훈(용마고), 두산의 서동환(신일고), LG의 정의윤(부산고), 한화의 양훈(속초상고)은 현역 시절 윤석민만큼 활약하지는 못했다. 3.78의 방어율에도 불구하고 18패를 당하며 불운의 에이스로 2007년을 보낸 윤석민은 2008년 14승 5패 방어율 2.33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작성하며 베이징 올림픽과 WBC에서 맹활약했다. 2008년에도 지독하게 승운이 따르지 않았고, 2년 동안 아쉬운 시즌을 보냈지만 2011년에 17승 5패 1세이즈 방어율 2.45로 다시 한 번 화려하게 비상했다. 2015년에는 마무리로 보직을 옮겨 30세이브를 올렸다. 14년 동안 기아에서 활약했고 통산 398경기 77승 75패 86세이브 18홀드 평균자책점은 3.29다.
 
- 류현진 (2006년, 동산고 / 한화 2차 1라운드 2순위 지명)
설명이 필요없는 선수. 타자에 박재홍이 있다면 투수에는 류현진이 있다. 역대 신인왕 중 가장 뚜렷하게 족적을 남긴 투타의 슈퍼 루키는 박재홍과 류현진 이상이 없다고 생각한다. 류현진은 루키 시즌이던 2006년 18승 6패 1세이브, 201.2 이닝을 투구하며 2.23의 방어율과 204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다승, 방어율, 탈삼진 타이틀을 차지했으며 신인왕과 시즌 MVP를 모두 거머쥐었다. 인천 동산고를 졸업한 류현진의 지명권은 SK에 있었다. 하지만 SK는 고교시절 부상 전력이 있던 류현진을 피해, 인천고 포수 이재원을 선택했다. 최정 때문에 윤석민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재원 때문에 류현진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SK에게는 엄청난 안타까움으로 남을 것이다. 물론 '류현진 드래프트'에 속상할 팀은 하나 더 있다. 롯데다. 롯데는 2006년 2차 1순위 지명을 갖고 있었지만 류현진을 거르고, 광주일고의 나승현을 선택했다. 고교시절 류현진과 라이벌로 평가받았던 나승현은 프로에서 5년만 활약하고 은퇴했다. 데뷔 시즌 팀의 마무리를 맡으며 51경기에서 3패 16세이브로 구원 부분 7위에 올랐다. 신인으로 나쁜 출발은 아니었지만 압도적이었던 류현진과의 잔인한 대비를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134경기에서 1승 12패의 통산 성적을 남기고 은퇴했다. 류현진의 활약은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2013년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LA다저스와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뛰며, 부상으로 결장했던 시즌을 제외하고 10시즌을 활약했다. 빅리그에서 1000이닝 이상을 던졌고 186경기에서 78승 48패. 통산 평균자책점은 3.27. 국내 프로야구에서는 현재 통산 112승을 기록 중이고 평균자책점은 2.92다. 다음 시즌에도 선수 생활을 계속한다면 한미 통산 200승이 가능할 것이다.

- 김광현 (2007년, 안산공고 / SK 1차 연고 지명)
류현진과 더불어 대한민국 원투펀치로 베이징 올림픽을 제패했던 김광현은 2006년의 류현진 만큼 화려한 데뷔를 하지는 못했다. 초반 프로 적응에 힘겨워하던 김광현은 시즌 막판 괴물 모드를 발동하기 시작했고, 개인 타이틀은 놓쳤지만, SK 왕조의 에이스로 발돋움하며 류현진은 해보지 못한 우승을 여러번 경험했다. 류현진과 함께 역대 한국 프로야구 최고 좌완투수로 꼽히고 있다. 이미 고교시절부터 동산고 류현진 이상의 위명을 떨쳤던 것이 안산공고 김광현인지라 SK도 1차 연고 지명에서 당연히 김광현을 선택했다. 신인왕은 비록 임태훈에게 넘겨줬지만, 데뷔 시즌에 신인상을 놓친 것을 제외하고는 무엇도 아쉬울 것 없는 프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SSG가 왕조를 경험한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타자에 최정이 있다면 투수에는 김광현이 있다. 2020년부터 2년간 미국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소속으로 메이저리그에 도전했던 김광현은 두 시즌 동안 35경기에서 145.2이닝을 소화하며 10승 7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2.97을 기록했다. 이후 SSG로 돌아왔고 복귀 후 지난 시즌까지 3시즌 동안 34승을 추가했다. 이번 시즌은 현재 1승 5패. KBO에서는 통산 395경기를 뛰며 171승을 올렸다. 

 

(6) 가정, 그리고 또 가정

만약 현대가 지명권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1차 지명을 할 수 있었다면 어찌 됐을까? 물론 한 팀의 가세로 말미암아 2차 지명의 흐름이 바뀌었을 수 있으므로, 이 경우 현대의 2차 지명이 똑같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가정하에 현대가 현재의 2차 지명을 유지하며 위의 4명을 모두 뽑았다면 현재 히어로즈의 투수라인은 어떻게 됐을까?

 

당시의 성적을 기준으로 하자면 김광현, 류현진, 송은범, 윤석민, 이현승이 선발 로테이션을 형성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중 몇 명은 선발로 나설 수 없다. 외국인 선수로 가세하는 투수도 생각해야 한다. 2008년 이후 히어로즈의 투수 외국인 선수 중 비교적 좋은 모습을 보여준 것은 2012년 이후의 브랜든 나이트와 앤디 밴 헤켄 정도라 오히려 국내파 5인 로테이션이 더 나을 수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엄청난 선발진을 형성했을 것은 자명하다. 여기에 불펜에는 장원삼, 김수경, 마일영, 전준호, 강윤구, 이보근, 오재영(오주원), 손승락, 신철인, 황두성 등이 대기하는 구조다. 김수경의 은퇴 무렵에는 한현희가 가세하고 김상수가 부상한다. 선발 자원이 워낙 탄탄하니 윤석민을 마무리로 돌릴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가정의 역사이며, 만약 현대가 실제로 이러한 선수 구성을 했다 하더라도 이들이 지금처럼 성장했을지 여부도 장담할 수 가 없다. 다만 밀레니엄을 맞이하며 한국 야구를 오랫동안 뒤흔들 것 같았던 현대 유니콘스라는 새로운 왕조가 급격하게 몰락해버린 것이 야구 외적인 것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 아쉬움이다. 만약 현대가 서울 연고를 탐내지 않았다면, 현대는 어쩌면 이전에 기아가 해태 시절 구축했던 압도적인 왕조를 계승하는 역대급 위세를 오랫동안 이어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모기업이 흔들린 비극의 역사도 없었어야, 선수 팔아 구단을 운영하는 아픔을 겪지 않고, 전력을 유지했겠지만...

728x90


Popular Posts
Calendar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250x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