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은 파나마를 다녀온 직후, 문화저널에 기고했던 글을 먼저 올린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라틴아메리카는 또 하나의 동경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해외여행 자율화가 시행된 지 20년이 넘었고, 이미 지난 2005년, 해외여행객수가 1000만이 넘었음에도 라틴 아메리카 여행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왠지 생소하다.
일단 우리나라에서 정확히 지구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특성상 긴 여행 시간, 그리고 그에 따른 여행 비용이 부담스러우며, 북미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들에 비해 치안에 대한 걱정, 나아가 잘 알려지지 않은 곳에 대한 불안감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카와 마야로 대표되는 이 곳, 문명의 요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다.
운하의 나라 파나마
라틴아메리카, 지리적으로 중남미 지역으로 묶는 이 곳을 여행하는 이들에게 가장 익숙한 곳은 중앙에 위치한 멕시코, 그리고 남미의 대국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파나마의 경우는 그저 ‘운하의 나라’ 정도로 인식되어 있으며, 실제로도 우리의 상식과 교육의 범주에서 많이 소외되어있다.
북미 대륙과 남미 대륙이 연결되는 파나마 지협에 위치한 파나마는 콜롬비아에서 분리 독립된 나라로, 길게 뻗은 국토의 총 면적이 78200㎢로, 우리나라보다 작은 나라이다. 2008년 기준으로 총 인구수가 300만 정도 남짓하고, 국민 1인당 GDP 역시 8000$가 되지 않은 소규모의 국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파나마라는 국가 자체가 생소한 것과 달리 대륙의 사이를 관통하여 지나는 64km의 파나마 운하는 수에즈 운하와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운하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사실 라틴아메리카가 여행자들의 관심을 끄는 주된 이유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잉카와 마야로 대표되는 문명과 광대한 자연, 그리고 인디오로 불리는 원주민들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사업, 휴양 등의 특별한 목적을 갖고 방문하는 이들이 아니라면, 이러한 것들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중남미에 분포한 멕시코의 테오티후아칸과 팔랑케 국립공원부터 적도가 지나는 에콰도르, 페루의 나스카 선화와 마추피추, 티티카카호수,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 사막과 칠레-아르헨티나 남쪽에 자리한 파타고니아, 브라질의 아마존, 그리고 이이스터섬의 거석상까지 수많은 볼거리가 관광객을 끌어당기고 있지만 막상 파나마는 이러한 여행객들의 시야에서는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다.
인디오 마을, 과쟈발을 가다
우연치 않은 기회로 파나마를 방문하게 된 필자가 찾은 곳은 과쟈발(Guayabal)이라는 생소한 곳이었다. 파나마시티에서 자동차로 6시간 가량을 달려 페냐브랑카(Peña Blanca)에 도착, 그 곳에서 부터는 말을 타고 무려 5시간을 더 들어가야 나타나는 곳이었다. 사실 자동차로 가는 것도 톨레(Tolé)까지만 제대로 된 포장도로였고, 이후 2시간 가량의 구간은 비포장도로와 오프로드 경주에 어울릴 법한 산길을 달려야 하는 곳이었다. 그나마도 예전에는 걸어서 하루 반을 꼬박 가야하는 곳이었단다.
그렇게 도착한 페냐블랑카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인디오들의 도움으로 말에 올라 산길을 달렸다. 사실 우리는 그들을 인디오, 혹은 인디언이라고 통칭하고 있지만 이는 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는 아메리카가 인도라고 착각했고, 때문에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고 불렀다. 그들 역시도 제대로 지칭되지 않은 이 명칭에 대해 달가워하지는 않는다.
필자와 일행들을 인도한 원주민들은 자신을 과이미(Guaimi / Guaymí)라고 불렀다. 일행을 인도한 고대권 목사는 이미 10년 넘게 이곳에서 원주민들에게 선교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러한 그 조차도 12년 전에 방문을 하고는 처음으로 찾는 곳이라고 했다. 당시에는 페냐블랑카까지 하루 반을 걸려서 걸어서 이동했을 만큼 오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세월을 훌쩍 넘겼음에도 목적지인 과쟈발은 여전히 멀고도 험한 곳이었다.
산에서 사는 민족
과쟈발은 산을 타고 들어가서 위치하고 있는 원주민들의 가장 깊은 정착지였다. 병풍처럼 둘러선 마지막 산을 넘으면 대서양이 나타나고 더 이상 원주민들은 살고 있지 않다고 했다. 페냐블랑카에서 이곳까지를 과이미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걸음으로 3시간 정도가 걸리는 거리라고 했다. 실제로 그들의 걸음은 산을 타고 넘는 말과 비교해서 조금도 쳐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외지의 불청객을 등위에 올리고 가끔씩 걷기를 투정하는 말들을 재촉하는 그들은 처음부터 도착 때까지 단 한 차례도 속도가 달라지지 않을 만큼 자신들의 터전에 완벽하게 동화되어 있었다.
고대권 목사의 동생이며 파나마의 보케떼 (boquete)에서 베이커리를 운영하고 있는 고선원씨 역시 12년 전에 이 곳을 방문했었다. 원주민들에 의하면 파나마 사람이 아닌 외지인의 방문은 12년 전 그가 다녀간 이후 처음이라 했다. 이번 방문의 목적은 원주민들에게 전파되고 있는 개신교의 선교활동 외에도 그들에게 의약품과 식량을 전달하고, 여행에 동참한 사진 동호회 ‘시간을 담는 사람들’ 회원들의 도움으로 그들의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것이었다.
깊은 경사의 산을 여러 차례 넘고 구름이 맞닿은 봉우리를 지나 한참만에 도착한 곳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만의 언어를 갖고 있지만, 파나마 정부에서 설치한 학교로 인해 이미 스페인어가 보급되어 있던 그들은 외지인의 방문을 살갑게 맞이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이 곳에 2년 전 그들 스스로 돈을 모아 발전기를 들여왔다고 했다. 하지만 전기 시설이 확충이 된 것은 아니라 야간에 교회에만 잠깐 불을 밝힐 뿐, 쏟아질 듯 한 별빛에도 불구하고 해가 지면 지척을 구분하기 힘들만큼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손전등은 필수품이었다.
거리상으로는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지만 산을 넘어야 닿을 수 있는 곳에 나뉘어 거주하고 있는 이들은 평소에는 서로간의 왕래가 흔치않고, 굳이 묻지 않으면 안부 이외의 대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웃음은 어색하지만 사진은 사랑하는 순박한 사람들
꺼내들었던 카메라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인 역시 어린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모습이 담기는 카메라의 LCD창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시했고, 꾸준히 사진을 찍어달라고 졸라댔다. 그렇게 사진을 찍고 나면 손을 잡고 어른들을 이끌고 나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섰고, 먼저 나서지 않을 뿐 나이 지긋한 할머니까지도 사진의 피사체가 되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있을수록 카메라를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에는 웃음이 없었다. 아무리 웃음을 유도해도 카메라를 바라보는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마치 카메라 앞에서는 그것이 정형화된 모습이라는 듯이라는 듯 말이다.
정적이고 단조로운 삶이 준 차분함일지, 아니면 그런 생활에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프린터로 뽑아 준 사진을 보고 다시 한 번 다가와 고맙다는 말을 하며, 뽑아준 사진을 계속 들여다보는 그들의 모습은 사진을 찍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희열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가족사진을 찍어준다는 말에 모여든 사람들의 수는 족히 500이 넘는 수였다. 산을 넘어 산재하여 거주하는 과이미들은 전체가 6~700명 정도라고 한다. 그들 중 대부분이 모여든 것이다. 마을 공터를 가득 채운 그들은 사진 촬영이 끝나고도 떠날 줄을 몰랐다. 10시간을 넘게 달려온 보람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순간과 공간의 열기였다.
문명의 허와 실
그림같은 풍경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은닉의 공간은 그들에게 깊은 여유와 안락함을 선물했지만 관찰자이기에 발견할 수 있는 불편은 존재하고 있었다. 인터넷과 핸드폰 없이는 하루도 버티기 힘든 현대 사회에서 전기와 전파가 제한된 공간에 사는 그들은 그들의 주식인 바나나와 플라타노가 충분치 않아 하루 한 끼 밖에 취식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들 스스로는 큰 불편을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안빈낙도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은 공간에 평화롭게 펼쳐진 공간은 그들에게 빠른 문명의 혜택을 선물하진 못했지만, 그들만의 소박함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현대화된 삶을 사는 우리들이 꿈꾸는 태초의 낙원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교통만 편리하다면 반드시 또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길이 뚫리고 외지인의 방문이 용이해진다면 이 낙원이 과연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길을 막고 시위를 하고 있는 다른 원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을 앞에 길을 새로 놓고 있는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여 시위를 진행하고 있었다. 각종 나무와 바위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축제처럼 춤을 추고 있던 그들은 우리가 정부와 관계가 없는 외국인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친절하게 인사를 나누고 길을 열어주었다. 급진적이고 첨예한 대립의 현장은 아니었지만 이것이 바로 새로 주입되는 빠른 문명과 변화에 대한 기존의 반발을 보여주는 작은 예가 아닐까?
생활필수품과 기초적인 식량의 부족 문제는 이들이 안고 있는 당면과제이며 분명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그것이 개발과 현대화라는 단어와 반드시 직결된다고 볼 수는 없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는 누구도 정답을 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인디오로 불리는 원주민들은 원래 이 거대한 대륙의 주인이었지만 이제는 소외된 소박한 사람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문명이라는 이름과 발전이라는 이름이 정녕 그들을 위한 장치인지에 대한 믿음은 충분치 않을 것이다.
접근하기 힘든 척박한 길을 돌아서 다녀오며 조금 더 편한 이동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지만, 낙원의 황홀경이 존재한 행복의 공간은 가속화된 현대의 삶과의 유리된 현실이 준 선물이었을 것이다. 문명의 이기가 반드시 행복과 같은 의미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상기해야 할 것이다.
2011년 당시 방문했던 파나마의 원주민들은 '과쟈발'이라는 곳에 거주하고 있는 '과이미'라는 인디오들이었다. 파나마시티에서 자동차로 6시간(비포장 도로 및 산길 1시간 30분 포함) 을 달리고 이어 말을 타고 다시 5시간 산길을 지나야 그들의 마을에 이를 수 있다. 14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과쟈발을 찾아봤는데 정확한 장소를 특정하기가 힘들었다. 아마 파나마 치리키주 보케론구(Boquerón District, Chiriquí Province, Panama)에 있는 행정구역이라는 곳이 가장 유사한 장소일 것이라 추정된다. 그렇다면 대략적 위치는 구글어스에서 봤을 때, 아래와 같다.
왠만한 여행지는 언제든지 다시 방문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는 누가 데려다 주지 않는 이상, 가고 싶어도 못 갈 것 같다. 찾아갈 능력이 없다. '과이미'에 대해 알아보니 파나마 서부에 거주하는 중앙 아메리카 인디언 족을 지칭하며 북부와 남부 과이미로 나뉜다고 한다. 동부 온두라스에서 북부 콜룸비아에 형성된 토착어인 치브찬(Chibchan)어족에 해당하며, 파나마와 코스트리카 등 약 17만 명이 이 중에서 과이미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응에베족(Ngäbe)이라고 불리는 과이미 민족은 파나마 서부의 베라과스, 치리키, 보카스 델 토로 지방에 살고 있다고 한다. 원래 이 지역의 주인이었던 과이미 족은 태평양에서 카리브해 지역까지 분포했으며,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조우하기도 했다. 1502년 파나마 북서부 보카스 델 토로 지역에서 콜럼버스 일행을 격퇴한 것으로 전해진다. 스페인의 정복자들에게 맞서 치열하게 대항한 역사를 갖고 있으며, 수렵과 채집 생활은 물론 화전 농법으로 옥수수, 콩, 감자, 파파야, 바나나, 밀, 고구마 등을 재배한다고 한다.
이것이 그들의 전통가옥이다. 지금은 나무를 판자형태로 잘라 벽면을 만들고 지붕에 슬레이트를 올리는 경우도 있지만 곳곳에서 이들의 이러한 전통 가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과쟈발로 가는 길목에 있는 페냐블랑카. 페냐블랑카는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다. 때문에 여기서 말을 타거나 걸어서 이들의 마을로 이동해야한다. 페냐블랑카에는 생뚱맞게 공중전화 하나가 이렇게 놓여있었다. 이 전화는 발신은 물론 수신도 된다. 휴대전화의 전파가 닿지 않는 지역이라 이곳에서 이용할 수 있는 통신 수단은 이 전화가 유일하다. 이 공중전화 번호로 전화를 걸면 전화벨 소리를 들은 누군가가 전화를 받고 다른 인디오들에게 소식을 전하거나 통화할 약속을 잡는다고 한다.
한참을 이미 달린 탓에 페냐블랑카에서 식사를 하고 이동하기로 했다. 우리가 식사를 하는 동안 식당 집 옆방의 문 틈으로 원주민 아이들이 신기하게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우리는 이곳에 파나마 사람을 제외하고 12년 만에 처음 등장한 외지인이었다. 곧, 저 아이들에게는 태어나서 처음보는 외지인일 것이다.
참으로 단촐한 식단. 하지만 이들에게 이정도 메뉴는 최정상급이라고 한다.
중남미의 광활함이 돋보이는 자연의 경관을 지나고 지나면 그들의 마을이 나온다.
내 말을 끌었던 과이미 인디오가 잠깐 쉬는 동안 내려갈 산 길을 바라보고 있다. 고산지역의 트래킹을 대비해서 새신발까지 샀지만 잠깐 걷는 구간에도 사경을 헤맸던 나와 달리, 이들은 슬리퍼나 진배없는 신발을 신고도 아무렇지 않게 산길을 누볐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차례도 속도가 달라지지 않을만큼 그들은 산타기의 달인들이었다. 심지어 30kg에 이르는 나의 카메라 가방을 들쳐 매고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들의 기본적인 생활방식은 자급자족이다. 그렇기에 머리도 서로 깎아주는 것이 기본이다.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했던 고대권 선교사님께서 현지 아이들과 함께 찍으신 사진. 이 아이들은 사진을 찍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굳이 입이 짧다거나 이들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이들 역시 식량이 부족한 상태라 하루 한 끼 정도의 식사밖에 하지 않는다고 했다. 식사는 우리가 가져간 라면으로 했다. 역시 야외에선 라면이 짱이다.
하루를 묵고 난 후의 아침. 해가 빨리 뜨고 빨리 지는 이 곳의 일상은 일찍 시작된다. 나뭇가지를 한데 모아 들고 빗자루질을 하는 원주민 여성. 신기하게도 정말 빗자루질이 제대로 됐다. 슬그머니 비슷한 것을 만들어 빗자루질을 해봤지만 나는 택도 없었다. 제대로 된 청소 도구도 제대로 못쓰는 나로서는 이들의 생활 능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 지역에는 과이미 인디언들은 현재 6-700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날 아침 가족 사진을 찍어준다고 하자, 인근 산을 넘어서 이 곳으로 모여든 인파는 500명이 넘었다.
죽은 듯 누워 있는 이 개는 사실 아침 햇살에 늘어지고 있는 현지 목사님 댁의 강아지이다. 이름이 맬랭이었던 것 같다. 생긴 것 같지 않게 무척이나 까칠하다. 놀랍게도 우리가 5시간을 편도로 와야했던 길을 주인 따라 마중 나와 왕복했던 엄청난 체력의 강아지다.
어찌보면 너무나 낙원같은 이곳은 식량이 넉넉치 않은 탓에 반대로 척박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후 얼마가 되지 않은 듯한 새끼 강아지가 그 모습을 대변해준다. 열심히 다니고 꾸준히 먹고는 있지만 너무 병약해 보이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fAntasize | 글 > dReam hunt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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