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가 보편의 정서가 되는 시대로 가고 있다.
3월 12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쩐과 혐오의 전쟁' 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곽정은 작가가 말한 저 이야기였다. 혐오가 대한민국 보편의 정서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 아니, 이미 보편의 정서가 되었다는 느낌이다.
이번 대선이 증명한다.
20대 대선 내내 '뽑을 후보가 없다'며, 거대 양당 두 후보의 인물론을 지적했지만, 그 기저에는 상대방에 대한 혐오가 있었다. 이러한 혐오는 학창 시절, 정치와 민주주의를 배울 때 기초 중의 기초로 교육받았던 '공약과 정책의 중요성과 신뢰성'을 대선의 어젠다로 만들지 못하게 했다.
우리나라의 선거는 그동안 '경상도와 전라도', '노년층과 젊은층', '진보와 빨갱이'라는 극단 대립의 갈등이 항상 존재했다. 이번 선거도 마찬가지. 이번에는 '젠더 갈등'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등장했고, 판을 흔드는 극단의 요소가 됐다.
혐오는 기본적으로 네거티브다. '네거티브를 하지 말라'고, 또 '네거티브하는 후보를 거르라'고 말하지만 결국 그 네거티브에서 윤석열 후보가 이겼다. 기존 언론도 이익 집단의 틀을 벗어날 수 없던 조건에서 페어플레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대선 공약집을 아무리 털어봐도 윤 후보 쪽에서 내놓은 것 중에는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윤 후보 입장에서는 뭔가 '위기 극복'을 위해 제시할 참신한 전략이 없었을 것이다. 정치 경험이 사실상 전무하기에, 그런 카드에서는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북한 선제 타격론'과 '여성가족부 해체'다. 놀랍게도 이게 먹혔다. 상식적인 선거였다면 합리적으로 적중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제대로 된 공약과 정책이 없었다는 것은 윤 당선인 지지층에서도 꽤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이들은 정권 교체를 반드시 해야 했기에, 그런 것들을 묻고 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들과 국민의 힘은 '이 나라가 엉망'이며, '대한민국의 현재 위기는 문재인 정부가 모두 자초했다'고 한다.
따라서 윤 당선인과 그 지지층은 현 정부가 하는 모든 것을 뒤집어야 한다는 논리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임기 말년의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40%가 넘는다. 역대 그 어느 정권과 비교해도 높은 수치다.
'부동산 정책'과 '조국 장관 사태'로 '부조리한 대한민국'이 부각되고, '친중 좌파'라고 비난 공세를 높였지만, 대한민국의 국가 위상은 역대 최고다. 외국 생활을 조금만 해 본 사람이라면, 현재 우리나라를 바라보는 세계의 시각이 이전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냉정히 되짚어 보면 이전 정부들의 집권 말기와 비교해 얼마나 안정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분도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 대한 긍정적인 데이터와 각종 지표는 모두 조작이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수치만 공개한 거라고 한다. 심지어, '민주당이 이 나라를 북한에 넘기려 한다'는 놀라운 망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다. 대한민국 사회에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채와 같은 이들이라 생각한다.
혐오가 보편의 정서가 된 대선은 종료 됐다. 그런데, 당선자가 취임은커녕 인수위의 활동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는데 벌써 삐걱대고 있다. 대선 내내 신경도 쓰지 않던 당선자 정책의 실효성과 약점이 갑자기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여성가족부 해체에 대해 국민의 힘 내부에서 이제야 이론의 목소리가 나왔다. 개인적으로 여성가족부 유지에 동의하지 않지만, 여성가족부 폐지는 진통이 있을 것 같다. 소상공인 지원을 위해 노인 일자리 예산도 삭감할 예정이라고 한다. 주 52시간 근무와 최저시급, 쉬운 해고를 제한하던 법령들은 윤 후보의 공약인 만큼 모두 폐지 수순에 들어갈 것이다. 아파트 값도 장기적으로는 인상될 것이다. 국민의 힘의 정체성 자체가 강남 아파트 값을 묶어둘 수 없기 때문이다. 임대료의 1/3은 임대인이 내는 것도 확정될 것이고, 대학 등록금은 인상될 확률이 크다.
180석의 거대 야당이 될 민주당이 이를 막아줄까? 그럴 리 없다. 국회에 앉아있는 그 180명 중 사회가 저렇게 바뀐다고 해서 타격을 입을 이들은 거의 없다. 저 주장을 내세운 이들에게 패한만큼, 저 주장이 현실이 됐을때 어떤 상황이 닥치는 지를 그대로 느끼게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할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 대선 이틀만에 윤 당선인을 뽑았던 지지자들의 절반 가까이가 윤 당선인을 뽑은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결과까지 나왔다.
걱정이다. 지금 불거진 내부의 문제보다, 이제 벌어질 외교의 문제가 더 큰 약점인데, 아직 이 부분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언급했다. 러시아의 푸틴, 중국의 시진핑, 일본도 나섰다. 다음 대통령에게 당연히 이어지는 과정이지만, 그 어느때보다 주변국이 민첩하다. 미국-러시아-중국이 다시 첨예하게 대립하는 흐름으로 가고 있다. 절묘한 줄타기가 필요한 시점인데, 이 부분에서 윤 당선인은 약점이 많다. 일본과의 관계 해법에서도 국민들의 자존심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높다. 그런 부분을 감수해야만 하는 이들이 '국민의 힘'에 워낙 많은 까닭이다.
국민의 힘은 기존의 당권파와 이준석 당대표, 그리고 윤석열 후보로 새롭게 대동 단결한 장제원, 권영세, 주호영, 원희룡, 권성동 김재원 등 검찰 출신 라인들의 치열한 내부 경쟁을 피해 갈 수 없다. '안철수와 국민의 당'도 딜레마다. 단일화 이전, 5% 안팎의 우세였던 지지율이 마지막에는 박빙으로 이어졌다. 간발의 차로 이겼기에 '안철수의 양보가 컸다'고 분석하기보다, 시너지 효과가 없었다고 볼 것이고, 이는 분명한 화약고다. 당분간은 허니문이 지속되겠지만, 내부 정리는 당연히 거쳐야 하는 수순이다. 균열이 생길 것이고 살생부가 등장할 것이다.
혐오와 네거티브가 득세했던 위기를 넘어선 만큼, 윤 당선인이 화합의 정치로 모든 걸 보듬어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솔직히 쉽지 않다. 벌써부터 지지층의 동요와 이반이 있다. 그리고 윤 후보의 공약과 정책 대부분이 갈등 조장과 갈라치기에서 이익이 되는 쪽의 손을 들어주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갈등의 봉합 자체가 쉽지 않다.
이재명 후보에게 30만표도 앞서지 못한 상황이다. 조금만 기반이 흔들려도 위기는 크게 올 수 있다.
정치 경험이 없어 정책 조율 능력도 기대하기 힘든 윤 당선인이 집권 초에 위기를 맞는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당연히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의 갈등을 더욱 첨예하게 고조시켜서 혐오의 정서가 극단의 대립으로 가고 절반 가까운 자신의 지지층을 공고히 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아내와 장모의 학력, 이력 위조 및 주가 조작 논란 등은 앞으로도 꾸준히 문제가 될 것이고, 윤 당선인은 이에 대해 모르쇠와 잘못 없다로 맞서 왔다. '국민의 힘'이라고 썼지만 사실상 '검찰당'이었던 윤 당선인 소속 정당의 강력한 힘으로 최대한 맞서겠지만, 지지층에 균열이 생기면 가족 비리 수사는 끝내 외면할 수 없을 것이고, 이를 막지 못할 때 윤 당선인은 조국 전 장관과 이재명 후보 측을 같이 치고 나올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다.
'공정'과 '상식'이라던 새 대통령의 후보 당시 강점은 순식간에 증발하고 약점만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대통령이 화합을 주도한다? 화합을 주도하고 상대를 끌어안기 위해서는 상대를 압도할만큼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윤 당선인은 취임도 하기 전에 흔들림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화합과 협치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조건으로 보인다. 대통령직을 유지하기 위해, 갈등에 뛰어들어, 봉합이 아닌 한쪽 편을 들고, 반대쪽을 나쁘게 몰고가는 방법의 외통수에 몰리지 않을까? 검사 출신이기에 오히려 그런 쪽에 재능이 있어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이는 국민의 불행이다.
안타깝다.
윤 당선인을 지지하지 않았고, 여전히 그가 대통령을 하기에 턱없이 모자라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못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당선 후 초반의 흐름 자체가 기대보다는 우려 쪽으로 흐르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 동안 우리 사회에 존재했던 '경상도와 전라도', '노년층과 젊은 층', '진보와 빨갱이',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갈등의 주체들 사이에는 적어도 중립의 요소들이 존재했다. 절충의 캐스팅보트가 가능했다. 하지만 젠더 갈등에는 중간 지점을 찾기가 참 힘들다.
이미 혐오가 보편의 정서가 된 사회. 그런데 더욱 더 그런 사회로 진행될 것 같아 걱정스럽다.
집단 지성의 힘이 이를 막을 것이라고 했지만, 미국도 트럼프를 선택했었고, 우리나라도 이번 대선의 결과가 나왔으니...
덧. 방송을 보고 방송과 관계 없는 이야기만 떠들었다. 이번 <그것이 알고 싶다>는 사이버렉카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사이버렉카는 '가로세로연구소'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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