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선택으로 대통령에 취임하면, 대부분 '헌법을 수호하고, 국민을 받들겠다'고 한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되는 까닭에 '(나를 위해) 헌법을 수호하고, (필요하면) 국민을 받들겠다'로 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결과가 어찌되든, 대통령에 오르는 순간, '이 나라를 위해 정말 잘해보겠다'라고 다짐하는 것은 분명 진심일 것이다. 방법의 차이일 뿐, 누구나 역사 속에 '훌륭한 대통령'으로 남고 싶을 것이다. 적어도 국가 의전 서열 1위에 오르는 자라면 그 정도의 명예욕은 당연하다. 윤석열 역시도 마음만은 '훌륭한 대통령'을 꿈꿨을 것이다. 김건희의 생각은 애초부터 달랐던 거 같지만...

1.
젤렌스키도 마찬가지다. 코메디언 출신으로 우크라이나 판 '댄싱 위드 더 스타'의 우승자이기도 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드라마에서 부정부패에 맞서 싸우는 대통령 역할을 연기하여 국민적 인기를 얻더니, 실제로 정당을 창당했고, 우크라이나의 6대 대통령이 된다. 정치적으로 전임 대통령인 페드로 포로센코와 크게 다른 노선은 아니지만, 전임 정부가 러시아와의 국경 분쟁 관리, 그리고 부정부패 척결에 실패하면서 정권을 잡았다. 젤렌스키는 이전 대통령들이 자신의 스텐스와 무관하게 러시아와 나토 사이에서 줄타기를 시도했던 것과 달리, 당당하게 푸틴에 맞서면서 나토의 한 축이 되고자 했다. 그것이 대통령으로서의 당당함이자 우크라이나의 확실한 안전을 보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NATO의 확장에 병적으로 민감한 러시아는 이미 신규 회원국을 늘리지 않는다는 약속을 나토와 맺은 상태였고, 부동항과 자원이라는 국익 앞에서는 어떤 명분도 마음껏 갖다 붙일 수 있는 국제 사회의 슈퍼파워였다. 전쟁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우크라이나로서는 절대로 전쟁이 발발하게 해서는 안되는 입장이었다. 젤렌스키는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블라디미르 푸틴의 역린을 건드렸고 결국 비극적인 전쟁이 발발했다.
러시아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날 것 같던 전쟁은 벌써 4년이 다 되어간다. 국지전같은 전면전 양상 속에 종전의 희망은 보이지만, 어떻게 종식되든 우크라이나는 패배자다. 영토의 일부를 러시아에 더 내주지 않는 이상은 종전이 쉽지 않고, 심지어 전쟁 중재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미국(미국이라 쓰고 트럼프라 읽는다)은 사실 우크라이나 영토 일부가 러시아에게 잘려 나가는 것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지금 러시아가 점령 중인 지역의 극히 일부만 되찾고 전쟁을 멈춰도 "내가 찾아준 거"라고 생색을 낼 거다.
더 중요한 것은 전쟁비용이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자신들이 원조한 무기와 군사력 등 모든 것들을 절대 공짜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게 이를 철저히 받아내겠다는 입장을 이미 여러차례 밝혔고, 꾸준히 진행 중에 있다. 이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것은 '평화'라는 명목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에게 합법적으로 수탈할 그들의 이익 때문이다. 중국이 독점화 하고 있는 희토류를 포함해 철광석, 티타늄, 리튬 등 어마어마한 우크라이나의 자원을 전쟁 비용으로 가져가겠다는 것을 이미 천명했다. 여기에 반발한 젤렌스키를 공식 석상에서 망신을 주기도 했으며, 러시아가 다시 침략하지 않는다는 안전장치를 위해 우크라이나는 종전 후 미군의 역할을 기대했지만,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에 미국 공장들이 들어가 있으면 러시아가 못 쳐들어온다'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는 이 전쟁이 끝난 후 미국에게 자국의 가장 큰 강점이었던 엄청난 자원들을 모조리 수탈당할 운명이다.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열강 시절에 이미 다양한 수탈 방법을 습득한 미국이다. 전과라고 할 법한 경험도 숱하게 쌓았다.
안타깝게도 우크라이나는 이를 거부할 방법이 없다. EU의 지원도 미국이 손을 빼는 순간 유명무실해진다. 러시아를 단독으로 막아낼 능력도 없다. 전쟁 피로도 또한 극심하다. 게다가 임기가 끝났음에도 선거 없이 대통령을 유지하고 있는 젤렌스키 스스로도 궁지에 몰려 있다. 전쟁 중이라 선거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재임 중에 있지만 이미 트럼프는 그에게 임기가 끝나 집권의 정당성이 없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전쟁 중에 측근들이 대형 비리를 저지르고 해외로 도주한 사실도 밝혀졌다. 전쟁이 끝나면 젤렌스키의 신변은 보장할 수 없다. 결국 젤렌스키는 종전 후 미국의 도움 없이는 버틸 재간이 없다. 젤렌스키와 우크라이나는 트럼프가 원하는 것들을 다 내줘야 한다. 결국 미국과 러시아에게 잔혹하게 수탈당할 운명만 남았다.
전쟁을 일으킨 푸틴을 원망해야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젤렌스키의 패착이라고 봐야한다. 지금은 '거대 러시아에 맞서는 애국자 젤렌스키'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지 모르지만,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미국과 유럽의 정치인들과 언론들은 젤렌스키에게 꾸준히 '드라마와 현실은 다르다'고 경고했다. 러시아를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고 있으며, 전쟁 위험이 촉발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막상 러시아가 치고 나오자, 러시아를 두둔할 수 없어 젤렌스키 역성은 들고 있지만, 지푸라기에 온몸을 감싸고 불구덩이로 뛰어든 젤렌스키에 대해서는 같은 편의 위치에 있는 EU도 달갑지가 않다. 러시아의 진출을 막기 위해 돕고 있을 뿐, 젤렌스키의 정치적 패착으로 발생한 손실이 너무 크다.
젤렌스키는 이후, 우크라이나의 역사에서 최악의 지도자로 평가될 것이다. 현실 정치를 오판하고 오직 당당함의 강경 노선으로 맞선 그가 전쟁에서 이겼다면 그야말로 영웅 그 자체가 됐겠지만, 이 패배로 우크라이나는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미국과 러시아에 차압당하게 됐다.

2.
이번엔 마차도다.
독재 정권이 쥐고 있는 조국에서 쫓겨나 한이 서린 베네수엘라인들에게 트럼프가 마두로를 잡아간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겠지만, 트럼프는 결코 정의로운 인물이 아니다. 그가 수차례 언급했던 마약 카르텔이 문제였다면 베네수엘라보다 멕시코와 콜룸비아와 결착을 봤어야 한다. 트럼프는 베네수엘라의 석유가 탐났고, 그걸 해냈다.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마두로는 싫어했을지언정, 자국의 석유 사업 국유화는 절대적으로 찬성했다. 트럼프는 베네수엘라의 석유사업을 민영화해서 그걸 모두 미국 기업이 갖겠다는 것이다. 미국도 엄청난 석유가 매장되어 있지만 미국과 베네수엘라의 석유는 경질유와 중질유로 차이가 있다. 경질유가 중질유보다 부가 가치가 높지만, AI 센터 등을 위한 대규모 공업 단지의 디젤 시스템, 그리고 미국 전역의 도로를 보수해야 하는 아스팔트와 관련해서 중질류는 상당히 가치가 높다. 베네수엘라를 통해 미국은 이를 값싸고 손쉽게, 마음껏 확보할 수 있다. 또한 베네수엘라가 중국과 경제적으로 돈독하다는 점에서도 자원을 통한 압박이 가능하다. 베네수엘라의 민주·진보 인사들은 미국의 선의와 정의를 믿고 싶겠지만, 미국이 원하는 것은 자원 수탈이다. 아무런 명분 없는 그린랜드도 훔쳐가겠다고 난리 치는 모습을 보면, 미국의 진심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미국은 니콜라스 마두로를 잡아가면서 정권은 마두로와 함께했던 이들에게 넘겼다. 민주주의와 정의를 말하고자 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선택이다. 미국은 과거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고 한반도를 신탁통치할 때도 기존의 친일파들을 그대로 고위직에 남겨뒀다. 심지어 해방 후, 우리나라의 반민특위 활동도 방해했다. 자신들의 섭정에 방해된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때도 지금도, 미국에게 중요한 건 그저 자국의 이익이다.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는 자신의 노벨 평화상을 트럼프한테 갖다 바쳤다. 주최측이 양도가 안된다고 거듭 천명했지만, 그는 주저 없었다. 이유는 하나다. 베네수엘라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자신에게 과도 정부의 지도자 자리를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악덕 상인이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다.
마차도는 베네수엘라의 부흥을 위해서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노벨상을 양도해서라도 그 자리에 오르고자 했다. 하지만 트럼프의 생각은 다르다. 베네수엘라를 누가 이끌던, 트럼프는 관심없다. 미국이 원하는 베네수엘라의 자원 수탈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정부라면 독재자든 공산당이든 상관없다. 이미 델시 로드리게스가 임시 대통령에 올랐다. 마두로 아래에서 부통령을 하던 인사다. 트럼프가 정의와 마약 문제 해결을 원했다면 결코 용인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결과다. 트럼프는 그저 자신의 장기말로 더 원활한 인물을 찾고 있을 뿐이다.
베네수엘라 역시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우크라이나와 같은 운명을 마주할 것이다. 미국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계속해서 빼낼 것이고, 베네수엘라는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마차도가 미국의 지지 속에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트럼프를 위한 노벨상 외에도 자국의 자원과 실리적인 사업권들을 헌상해야 한다. 마차도가 대통령이 되면,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자유 민주주의의 승리를 기뻐할 지 모르지만 환호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생명줄을 움켜쥔 미국은 매우 이기적이며, 트럼프는 자신들을 견제하는 그 어떤 세력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EU도 UN도 NATO도 인정하지 않는다. 철저히 수탈당하면 국민들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 질 수 밖에 없고, 천금같은 자신들의 자원이 외세에 수탈되는 장면을 목도하며, 이를 견제할 수 없는 정부에 대한 지지는 철회될 수밖에 없다. 미국이 개입한 남미의 정권들이 모두 몰락의 역사를 반복하는 것은 미국이 그 대가를 통해 철저하게 경제적 유린을 자행했기 때문이고, 미국은 그들의 피와 눈물은 (자신들의 이익이 담보되지 않는 한) 철저하게 외면했다. 트럼프는 이러한 미국의 역사 속에서도 그런 부분에서는 무척이나 독보적인 인물이다.
노벨평화상을 주관하는 노르웨이가 격분했듯, 마차도는 12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노벨상의 권위와 명예를 모욕했다. 자신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개인의 영광을 포기한 선택이라 생각하겠지만, 결국 자신의 영달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지적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배네수엘라의 새로운 임시 정부는 미국의 입김에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꾸준히 자신들에게 반기를 들었던 마차도에게 관대할 이유는 없다. 마두로가 실각했다고 마차도의 입지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이 마차도를 위해 특별한 무언가를 해 줄 이유는 없다. 노벨 평화상 헌납은 이런 상황에서 마차도가 "나 좀 살려주세요"라고 트럼프에게 애원한 것, 그 이상의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결국 마차도는 실리와 명예 모두를 잃었다. 중남미의 많은 반체제 인사들이 미국의 지원 속에 정권을 잡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들의 지탄을 받으며 비참한 말로를 걸었다. 어렵게 정권을 잡는다해도, 트럼프의 꼭두각시를 벗어날 수 없는 마차도 역시, 특별히 다른 길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현 시점, 세계에서 가장 미련한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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