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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ize | 글/oTaku

[영화] 불멸의 주체를 바꾼다 - 드라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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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대신하는 닉네임을 스스로 칭할때는 상당한 어색함과 무안함을 감수해야 한다. 무언가의 제품 번호같은 CK17에 익숙해지기 전, 고맙게도 수여(?)받은 CK의 풀네임도 부담스러웠고, 어린 시절부터 철없이 ID에 적어왔던 DRACULA(드라큘라)도 돌이켜보면 상당히 당혹스럽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 그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던 것이고, CK와 더불어 존재했던 다른 닉네임은 대놓고 악마의 이름이다보니 꺼내놓기가 참 민망하다. 하지만 드라큘라 역시 서양 문화권에서는 우리나라의 처녀귀신에 필적하는 보편화 된 심령적 공포의 대상인가 보다. 20년 전 쯤, 우연치않게 잠깐 알게됐던 동유럽의 한 친구는 '닉네임으로 사용하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가 전혀 없는 불쾌한 존재'라고 드라큘라를 정의한 바 있다.

 

종종 사람들이 블로그의 제목이 '드라큘라 성'인 것에 대해 묻는다. 결론적으로 작명 센스와 창의력의 부재가 낳은 결과다. '박진호의 블로그'라는 이름을 피하기 위해 고르고 고르다가 생긴 참사다. 싸이월드의 홈2나 네이버 블로그에서도 다른 이름은 찾지 못했고,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지금 보면 중증 중2병의 발악같기도 하다. 실제 '드라큘라의 성'이라고 전해지는 루마니아 브라쇼브 근교의 브란 성(Bran Castle)과도 당연히 아무 관계 없다. 

 

어려서부터 '드라큘라'는 내게 공포보다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브람 스토커(Bram Stocker) 원작의 소설 [드라큘라]가 처음 영화화 된 것은 아마 1930년대 초반일 것이다. 토드 브라우닝(Tod Browning) 감독이 만든 이 작품에서 세계 최초로 드라큘라를 연기했던 배우는 벨라 루고시(Bela Lugosi)였다. 당초 브로드웨이 연극배우였지만, 드라큘라를 연기하면서 본격적인 명성을 얻었고, 당대의 대표적인 호러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이후로도 다양한 배우가 '드라큘라'를 연기했지만 벨라 루고시의 이미지를 넘어섰던 이는 없었던 것 같다. 흑백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드라큘라 백작'을 떠올리면 가장 익숙한 비주얼로 떠오르는 것은 여지없이 벨라 루고시다. 그는 사망 후에도 드라큘라 복장으로 무덤에 안장됐다고 한다.

 

벨라 루고시 (1882~1956)

 

 

토드 브라우닝 감독의 작품 이후, '드라큘라'는 꾸준히 영화에 등장했다. 1958년, 동명의 작품에서 드라큘라를 연기한 크리스토퍼 리(Christopher Lee)는 여러 작품에서 드라큘라와 뱀파이어로 등장했다. 1979년에는 존 바담(John Badham) 감독, 프랭크 란젤라(Frank A. Langella Jr) 주연의 '드라큘라'가 등장했고, 2013년에는 [드라큘라 3D], 2014년에는 [드라큘라 : 전설의 시작]이 발표됐다. 2010년에는 미국 NBC에서 10부작의 드라마 [드라큘라]가 방송됐고, 2020년에는 영국 BBC에서 제작한 넷플릭스 3부작 드라마 [드라큘라]가 제작됐다.

 

2004년에는 시선의 중심을 드라큘라가 아닌 그의 천적 아브라함 반 헬싱 교수에게 맞춘 영화 [반 헬싱]이 개봉했다.  드라큘라가 뱀파이어의 상징인 것 처럼 반 헬싱은 뱀파이어 헌터의 상징이 됐다. [반 헬싱]은 드라마로도 제작됐는데, 여기서는 아브라함 반 헬싱이 아닌, 그의 후손을 중심으로 뭔가 뱀파이어의 형태에서 조금은 차이를 보이는 몬스터들을 상대하기도 한다.

 

드라큘라의 원형에서 비롯한 흡혈귀 뱀파이어로 범위를 넓히면 톰 크루즈, 브래드 피트, 안토니오 반데라스, 크리스찬 슬레이터 등의 초호화 출연진을 자랑한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도 있고, 뱀파이어를 등장시킨 초현실주의의 드라마와 영화가 수없이 등장했다. 영화로는 [블레이드], [트와일라잇], [뱀파이어] 등이 있고, 이전에 내가 글을 올린 [렛미인] (https://contract75.tistory.com/274)도 있다. 드라마로도 [트루 블러드], [뱀파이어 다이어리] 등 시리즈가 제작됐다. 뱀파이어 전체는 물론, 이 종족의 알파 메일이라 할 수 있는 드라큘라는 여러 작품에서 악역과 선역, 주연과 조연을 오가며 다양하게 그려지고 있다. 브로드웨이에서는 2004년 프랭크 와일드혼에 의해 뮤지컬로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는 2014년 초연됐다.

 

15세기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이었으며, 루마니아의 영웅인 블라드 3세 드라큘레아(Vlad III Drăculea) 라는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한 브람 스토거의 소설 [드라큘라]에 등장하는 드라큘라 백작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흡혈귀의 대명사이자 서양 문화권에서는 어둠의 지배자로 각인됐다. 헐리우드는 드라큘라를 악마로 규정지었고, 햇빛과 마늘을 싫어하며, 저주받은 삶의 연명을 위해 미녀를 찾아 흡혈하는 공포의 대상이 된다. 영화에서 등장한 드라큘라가 불멸의 삶을 획득하고 연명하며 흡혈하는 모든 일련의 과정은 그저 탐욕과 공포의 요소일 뿐이지, 그 배경과 개연성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잔혹한 악마였으며, 신과 십자가를 두려워하다가 태양의 정죄에 괴로워하며 사라진다. 추후의 창작 작품에 등장하는 드라큘라의 후예인 뱀파이어들은 때로는 하급 악마로 묘사되기도 한다. 

 

 

 

 

'드라큘라'를 다룬 많은 영화 중 내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것은 1992년 개봉한 작품이다. 국내에는 그냥 [드라큘라]라는 제목으로 알려졌지만, 원작 제목은 [Bram Stocker's Dracula]로 오스카 감독상 5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2회를 수상한 영화 '대부'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 감독이 제작했다. 브람 스토커의 집필 이후, 공포 케릭터의 대명사가 된 드라큘라에 대해 메이저 영화 상으로는 거의 처음으로 다른 시각을 보여준 작품이다. 초현실적인 존재이면서 절대적 악마로 묘사된 드라큘라에게 면죄부를 적용한 첫 작품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드라큘라' 자체가 공포가 아닌 호기심의 대상이었기에 이 작품이 '가장 타당한 해석이 아닐까'하는 느낌을 줬다. 어쩌면 이전의 작품들은 브람 스토커의 원작에서 '흡혈귀 드라큘라 백작'이라는 캐릭터를 비교 불가의 악마로 차용하여 그 이미지에 집중했다면,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캐릭터의 악마화보다 서사에 더 집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뮤지컬 [드라큘라] 역시 굳이 과거의 영화 작품들 중에서 원전을 찾자면, 이 작품과 가장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브람 스토커가 '드라큘라'를 탄생시키며, 그를 어떤 이미지로 그리고 싶어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초월적이고 악마적인 존재가 500년의 시간을 건너 연명하고 허무하게 소멸되어야 했던 이유를 가장 타당하게 설명해 준 영화가 바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제작한 1992년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코폴라 감독은 영화를 제작한 후 "원작에 가장 충실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힌 바 있다. 코폴라가 '드라큘라'를 통해 전달하는 감정은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며, 호러가 아니라 로멘스다. 원작의 메인 포스터에도 핏빛 제목 위에 'Love Never Dies'라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던지고 있다. 

 

 

 

 
드라큘라는 애초 악마의 자식으로 태어나 신에게 버림받은 사악한 괴물이 아니었다. 십자가가 무서워 벌벌 떨거나, 신 앞에서 비참하도록 작아지는 악마도 아니었다.  적에게 잔혹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神'인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조국을 지키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이슬람 세력과 맞섰던 인물이으며, 평생을 걸고 자신의 아내 한 사람만을 위해 헌신한 트란실바니아의 영주(영화에서는 왕자로 등장)였다. 신실했던 그를 무너뜨린 것은 끝내 그를 지켜주지 못했던 하나님의 그림자와 율법이었다. 그가 생의 모든 것을 걸고 지켰던 하나님은 끝내 그의 삶과 아내를 지켜주지 않았다. 이단의 세력과 처절히 맞서 하나님의 신앙을 지켜냈지만, 승전의 소식은 와전됐고, 드라큘라가 패전하고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한 그의 아내는 절벽 아래 강으로 몸을 던져 목숨을 버렸다. 그녀는 죽음으로 그를 따라 다시 재회하겠다는 유서를 남긴다. 이슬람 세력을 제압하는 순간마다 "주를 찬양하라"고 했던 드라큘라를 맞이한 것은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아내의 주검이었다. 처절하게 무너진 그에게, 그가 지켜낸 신앙의 사제는 "자살한 이의 영혼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저주를 던진다. 그것이 '신의 율법'이라며, 그가 지켜낸 종교의 절대자는 그의 아내를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분노한 드라큘라는 십자가의 중심에 자신의 검을 꽂고, 십자가에서 흘러내린 피를 받아 마시며 "피는 생명"라고 말한다. 자신의 종교를 부정하는 것이며, 불멸의 삶을 사는 악마로의 길을 선택한 순간이다.

 

'드라큘라'에게 십자가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경멸이며 분노다. 그에게 십자가는 성물이 아니다. 수많은 호러의 장면에서 십자가 앞에 무력한 드라큘라가 그려진다. 그가 십자가를 피하는 것은 신의 영험함에 대한 굴복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버리게 만들었고, 견딜 수 없는 배신을 선사한 아픔의 표지이기 때문이라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십자가가 그에게 주는 고통은 정죄한는 신의 권능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의 각인이다. 천주교와 기독교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상징이겠지만, 드라큘라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과 인간의 삶을 포기하게 한 한낱 저주의 토템이다. 

 

이것이 교회를 위해 싸운 대가인가? 신을 버리겠다. 죽음에서 부활하여 어둠의 힘으로 신에게 복수할 것이다.
피는 생명이다. 생명은 나의 것이다

 

 

이후 4세기 동안 불멸의 삶을 살았지만, 드라큘라가 신을 부정하며 복수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흡혈을 통해 자신의 노예를 만들고, 자신과 같은 저주 속에 구속되는 자들을 만들어 내지만, 신에 맞서고 대항하는 판타지의 악마들이 인간을 궤멸시키려 드는 것과 달리 드라큘라의 초점은 철저히 개인적이다. 세상에 대한 경멸로 종교에 대한 파괴나 약탈도 없었다. 불멸의 목적은 복수가 아닌 기다림이었다. 끝내 함께하지 못했던 아내의 환생을 500년간 기다렸다. 마침내 아내를 다시 찾게 되고, 그를 단순한 악마로 치부했던 아내의 환생(미나 머레이)도 전생을 기억해내지만, 신은 마지막까지도 이들의 재회에 행복을 허락하지 않았다. 500년 전 드라큘라에게 아내의 죽음을 강요했듯, 이번에는 미나에게 드라큘라의 죽음을 선사한다. 잔인한 신의 마지막 배려는 드라큘라가 미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며 눈을 감게 한 것 뿐이었다. 이를 두고 신의 용서와 구원이라 포장할 수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전능한 하나님은 늘 옳다'고 포장하는 기독교적 관점일 뿐, 드라큘라에게 영면의 안식을 허락한 것은 신이 아닌 미나였다. 결국 드라큘라의 신앙은 미나였고, 구원은 '하나님이 아닌 미나의 사랑'이었다. 이 또한 미나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함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지만, 그 정도면 포장도 병이다. 드라큘라의 구원과 용서는 모두 그 스스로 행한 것이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공주들 중 가장 빛나는 여인이었소. 당신을 위해 시간의 대양을 건너왔소."

 

 

드라큘라는 아내에게 항상 진실했다. 인간이 아닌 악마가 된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 놓는다. 자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 영원히 함께 하겠다고 하는 그녀에게 그런 삶을 줄 수 없다고 단언한다. 마지막까지 이기적이지 않았다. 트란실바니아의 고성에서 500년간 오직 한 사람만을 기다렸다. 그런 삶의 영위를 위해 다른 이들을 무너뜨리기도 했지만 잔혹함의 정도가 신에 비할 바는 아니다. 여전히 많은 이의 경배 속에 흥청거리는 그 신을 믿는 후예들은 드라큘라가 목숨을 걸고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줬던 과거조차 부인한다. 이 조차 '신의 시험'이라 한다면, 드라큘라가 걸어야 했던 처절한 삶에 비해 치졸하고 옹졸하다는 비난을 거두기가 어렵다.

 

드라큘라는 비록 헐리우드의 영화를 위한 흡혈귀로 남았지만, 인류에게 '사랑'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지속되어야 할 진실에 더 가깝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저주로 내던져 기억하고 기다린 이... 그것이 바로 드라큘라의 진면목이다. 느낄 수 없는 공허한 미사여구로 증명하는 신의 사랑보다 명확하며 가시적이다.

 

 

"Love Never Dies."

 

 

대표적인 연기파 배우인 게리 올드만(Gary Oldman)이 '드라큘라'로 분했고, [가위손]의 매력적인 소녀 위노나 라이더(Winona Ryder)가 '드라큘라의 뮤즈이자 신앙'이었던 '미나 머레이'를 연기했다. [양들의 침묵]에서 엽기적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로 등장했던 안소니 홉킨스(Anthony Hopkins)가 '반 헬싱'으로 열연했고, [아이다호], [폭풍 속으로]로 주목받던 키아누 리브스(Keanu Reeves)가 또 하나의 불행한 인생인 '조나단 하커'를 맡았다.

 

드라큘라 (Bram Stoker's Dracula, 1992, 미국)

감독 :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
드라큘라 : 게리 올드만(Gary Oldman)
미나 머레이 : 위노나 라이더(Winona Ryder)
반 헬싱 : 안소니 홉킨스(Anthony Hopkins)

조나단 하커 : 키아누 리브스(Keanu Ree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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